Article/Review
Jeru The Damaja [The Sun Rises in the East]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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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3. 21:19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01. Intro (Life)
02. D. Original
03. Brooklyn Took It
04. Perverted Monks In Tha House (Skit)
05. Mental Stamina
06. Da Bichez
07. You Can't Stop The Prophet
08. Perverted Monks In Tha House (Theme)
09. Ain't The Devil Happy
10. My Mind Spray
11. Come Clean
12. Jungle Music
13. Statik
Record Label : PayDay/FFRR
Released Date : 1994-05-24
Reviewer Rating : ★★★★☆
Intro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 듣는 장르(혹은 좋아하는 스타일)가 있기 마련이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94~'95년에 발매된 힙합 앨범들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마냥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가끔은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몇몇 음반의 타이틀명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마치 정제되지 않은 보석처럼 로우(raw)하고 칙칙한 사운드로 대변되는, 로-파이(Lo-fi)의 미학이 담긴 90년대 초중반의 앨범들이 주는 매력은 현 힙합 씬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과는 너무나 상이하지만, 나를 포함해 일단 한 번 빠져든 사람이라면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미스테리한 마력이 있었기에 그런 설렘이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당시의 그러한 스타일을 주도해가던 프로듀서 중엔 대표적으로 - 물론 르자(RZA)를 비롯한 여러 프로듀서들이 비슷한 시기에 명성을 날리긴 했지만 -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 이하 프리미어)가 있었고, 94년 프리미어의 행보를 추적해 보면 제루 더 대머저(Jeru The Damaja)라는 랩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Here Comes Jeru's Debut Album
Kendrick Jeru Davis라는 본명을 가진 제루 더 대머저(이하 제루)는 10살 때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90년대 초부터 갱스타 파운데이션9Gang Starr Foundation)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갱 스타(Gang Starr)의 [Daily Operation] 앨범 수록곡 "I'm the Man"에서였는데, 마지막 벌스에서 멋진 랩을 감상할 수 있다. 갱스타 파운데이션의 멤버로 활약하며 투어에도 합류하는 등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가던 중 93년 "Come Clean"이란 싱글 앨범을 선보이며 계속해서 인지도를 넓혀 가는데, 이는 이듬해 발매될 그의 정규 앨범을 위한 전초전격인 곡이었고, 이듬해인 '94년 마침내 DJ Premier가 전 곡 프로듀싱을 도맡은 데뷔작 [The Sun Rises in the East]를 내놓기에 이른다.
프리미어와 구루(Guru)가 Executive Producer로서 제작을 총괄한 이 앨범은 암흑빛으로 물든 뉴욕 시의 고층 빌딩들과 교각을 그려낸 커버부터 음산하고 거친 분위기를 메인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지레 짐작케 한다. 프리미어가 꾸준히 보여주었던 궁극의 2박자 루핑이나 턴테이블 리릭으로 훅 처리하기와 같은 작법이 비슷한 시기 그가 일궈냈던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질펀하게 깔아둔 비트 위에 화답하듯 제루는 최상의 랩을 들려준다. 적당히 묵직한 톤으로 명확한 발음을 구사하며 그다지 스피디하진 않지만 라이밍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수준급인데, 또렷한 발음을 기반으로 하는 견고한 라임은 40분의 러닝타임 도중 어디에서나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굳이 특정 구절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
게다가 제루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단어를 끊어 읽는 독특한 랩 스타일을 지녔는데 이 또한 프리미어의 비트와 매우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가령 "D. Original"을 듣다 보면 histo-ry, pin-eal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단어 사이를 끊어 읽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덴터티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제루만의 스타일로 남아 그의 최신작 [Divine Design]에서까지도 캐치할 수 있다.
가사의 내용에 있어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론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인 표현이 자주 쓰인 탓인지 마초이즘의 극을 달리는 여타 하드코어 랩과는 구분 지을 필요가 있다. 백인들(Whitey)을 악마(devil)에 빗댄 "Ain't the Devil Happy"와 예언자(Prophet)와 Mr. Ignorance(무지)의 대결을 묘사한 "You Can't Stop the Prophet"은 우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재치 있는 라임으로 창녀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Da Bichez", "I'm the Man"에서부터 천명했던 "Dirty Rotten Scoundrel"이란 닉네임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D. Original"과 "Come Clean"에 이르기까지 제루의 가사는 브루클린에서 살아오면서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경험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외에 아푸-라(Afu-Ra)와 벌스를 주고받는 - 2집의 속편 "Physical Stamina"를 연이어 들으면 더욱 흥미로운 - "Mental Stamina"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트랙이며, 각각 케이알에스원(KRS-One)과 오닉스(Onyx)의 랩을 턴테이블 리릭으로 활용한 "Brooklyn Took It", "Come Clean"의 훅(hook)이 주는 재미 또한 놓쳐선 안 될 흥밋거리 중 하나이다. 이처럼 앨범은 특별히 흠잡을 데 없이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고, 마지막 트랙 "Statik"에 이르기까지 거친 비트와 랩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짐으로서 제루는 당시 구루와 프리미어가 물색하던 "Next Generation of Gang Starr"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을 입증해낸다.
And Then...
그로부터 2년 뒤인 96년 다시 한 번 프리미어와 호흡을 맞춰 'Hiphop Savior'와 'Kung Fu Fighter'의 이미지메이킹을 병행한 2집 [Wrath of the Math]를 발매하고 이 또한 언더그라운드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허나 '90년대 말 돌연 프리미어의 조력에서 벗어나 Knowsavage라는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신작 [Heroz4hire]는 제루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한 곡 하나하나가 기대 이하라는 혹평을 들었고, 일부 평단에서는 전작들의 명성을 깎아내린 졸작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에드 단테스(Ed Dantes)와 세이버(Sabor)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한 최신작 [Divine Design](2003) 또한 그다지 귀에 감기는 맛이 없어 아쉬움만이 남는다.
Outro
간만에 무엇 하나 버릴 곡이 없던 그의 데뷔작을 CD 수납장에서 꺼내어 듣다 보니 3집 이후의 결과물과 더더욱 대조를 이루는 것 같고, 동시에 '90년대 말부터 전개해온 음악 활동을 상기하자니 맥이 빠지기도 한다. 인디레이블을 설립하고 소수의 지인들을 불러들여 프로덕션을 구축하는 등 독립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 무엇일까? 단지 프리미어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음악 행보를 이어나가기 위함이었을까...?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결과물의 퀄리티를 생각하니 현재 그의 행보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해 온 까닭은 또 뭘까? 모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좀 더 많은 프로듀서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항상 그렇진 않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고, 현재 그런 점에 대해선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 물론 갱스타 파운데이션이 와해됨에 따라 세간에선 크루를 완전히 탈퇴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무근이라 한다. 지금도 가끔씩 프리미어를 만나고 있으며 현재 릴 댑(Lil' Dap)과의 조인트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고 하니 말이다.
뭐 2집 이후 펼쳐나간 행동들이 어찌됐건 간에 그의 데뷔작은 마치 다소 침체기에 빠져 있었던 동부 힙합 씬의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등 힙합의 역사성에서도 기여한 바가 크기에 94년을 대표할만한 역작임은 분명하다. 동년에 발매된 갱 스타의 [Hard to Earn]이나 나스(Nas)의 [Illmatic]에서 느낄 수 있던 특유의 쾌감이 고스란히 담긴 언더그라운드 클래식 [The Sun Rises in the East]는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명반으로 영원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중반의 힙합씬에 낭만을 갖고 있는 리스너라면 제루의 3집 이후의 음악 행보는 잠시 잊고 [The Sun Rises in the East]를 다시금 플레이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