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3. 20:55

El-P [Fantastic Damage] (2002)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Record Label : Definitive Jux
Released Date : 2002-05-13
Reviewer Rating : ★★★★

1. Fantastic Damage
2. Squeegee Man Shooting
3. Deep Space 9mm
4. Tuned Mass Damper
5. Dead Disnee
6. Delorean
7. Truancy
8.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9. Accidents Don't Happen
10. Stepfather Factory
11. T.O.J.
12. Dr. Hellno and the Praying Mantus
13. Lazerfaces' Warning
14. Innocent Leader
15. Constellation Funk
16. Blood

Before Fantastic Damage

컴퍼니 플로(Company Flow)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엘-피(El-P)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로커스(Rawkus)의 이름을 빛낸 [Funcrusher Plus]에서 그가 차지하던 비중은 한솥밥을 먹던 미스터 렌(Mr. Len)과 빅 주스(Bigg Jus)의 그것과 차별화될 만큼 컸던 탓에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컴퍼니 플로의 해체 직전이나 해체 이후에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두며 게스트로서의 활동도 틈틈이 해내는데, 베이 에어리어(Bay Area)로 날아가 쿼넘(Quannum) 패거리의 앨범과 델 더 훵키 호모사피언(Del The Funky Homosapien)의 솔로앨범, 핸섬 보이 마덜링 스쿨(Handsome Boy Modeling School)의 앨범에 참여하는가 하면 데프 젹스(Def Jux)라는 인디레이블을 설립하여 언더 힙합씬의 도처에서 여러 실력자들을 규합하기도 한다. 컴필레이션 앨범 [Def Jux Presents Vol.1]으로 데프 젹스의 출범을 알리며, 레이블의 이름을 내건 첫 정규작인 캐니벌 옥스(Cannibal Ox)의 [The Cold Vein]에선 앨범 프로듀싱을 총괄하며 두 엠씨와 호흡을 맞췄다. 우주적인 사운드와 캐니벌 옥스의 멋진 랩이 조화를 이룬 [The Cold Vein]은 같은 해 역시나 데프 젹스에서 발매된 에이솝 락(Aesop Rock)의 [Labor Days]와 함께 많은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엘-피의 솔로앨범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Enter the Fantastic Damage

엘-피는 캐니벌 옥스의 앨범을 작업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솔로앨범 제작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였고, 캐니벌 옥스의 앨범으로 불타오른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년 후 마침내 [Fantastic Damage]라는 타이틀의 신작을 발표한다.
결론부터 말해 전체적인 사운드의 흐름은 '자기과시'와 '지독함' 그 자체이다. 캐니벌 옥스의 앨범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준 난잡한 비트들과 독특한 드럼 프로그래밍은 본작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여 이른바 '극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70여분의 긴 러닝타임이 끝나는 시간까지 청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는 엘-피의 계속되는 엇박 랩과 꽈배기 마냥 꼬일 만큼 꼬인 비트, 그리고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하는 디제이 어빌리티스(DJ Abilities)의 스크래칭을 감상하게 된다. 본 앨범의 제작에 사용된 샘플러와 믹서, 오르간의 리스트를 앨범 부클릿에 열거해둔 것 또한 충만한 자신감의 표현(혹은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99년 12인치 싱글로 먼저 선보였던 "Deep Space 9mm"를 주목해보자. 독특한 비트와 공격적인 랩은 충격으로까지 다가오는데, 국내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기에(심지어 이 곡을 듣고 나서 곧바로 CD를 구매하러 뛰쳐나갔다는 분들도 있었다) 마땅히 비중을 두고 들어봐야 할 곡이다. 엘-피 주위의 사람들이 항상 그에게 빨간 총을 겨누는 독특한 컨셉의 뮤직비디오도 또 하나의 재미로 작용한다.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루브함을 제공하는 "Dead Disnee", 3연작을 한 곡에서 감상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끝을 향해 달리기 위한 전초전 격인 유일한 인스트루먼틀 트랙 "Innocent Leader", 또다시 분노의 랩으로 치솟는 "Constellation Funk"에 이르기까지 굳이 특정 트랙에 집착할 필요 없이 곡 하나하나가 엘-피의 자신감의 산물이다.

자, 그럼 이렇게 시종일관 첨단의 사운드로 청자의 귀를 압박해 오는데 이에 상응하는 엘-피의 랩은 어떨까? 컴퍼니 플로 시절부터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든 빠른 랩을 구사하며, 랩 톤 자체가 개성이 없는 까닭인지 간혹 '국어책을 빠르게 읊조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하지만 그의 랩은 가사를 세밀하게 읽어가며 들어볼 필요가 있다. 엘-피는 앨범 전반에 걸쳐 부정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를 묘사하며 때로는 직설적인 맹공을 퍼붓기도 하는 등 표출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Fantastic Damage"에서부터 시작되는 분노의 랩핑을 서두로 파멸의 디즈니랜드를 묘사하는 "Dead Disnee", 소름 돋는 미래를 생생하게 그려낸 "Stepfather Factory", 몰지각한 랩퍼들을 비난하는 "Constellation Funk" 등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성향의 가사는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차례도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반면에 이처럼 냉철한 가사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특유의 라이밍과 위트를 캐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Truancy"에서 들을 수 있는 'Rawkus was like, "we're gonna take this label to another level" / (fuck that) I'm gonna take this level to another label'(엘-피는 컴퍼니 플로 시절 로커스 레이블을 맹비난하며 인연을 끊어버린 적이 있는데, 쌓였던 게 많았는지 자신의 솔로앨범에서 이처럼 재치있는 워드플레이로 레이블을 조롱한다), 'Jam Master Jay would've shot you (I stopped him)'과 같은 구절을 들으면 곡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본 앨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엘-피의 의도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네거티브한 신념을 끊임없이 폭파하는 사운드와 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간 여러 매체에서 지적해 왔듯이 이러한 초고밀도 비트와 랩의 동시 감상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는 피해갈 수 없는 단점으로 지적된다. 청자의 귀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화려한 전자음과 스피디한 랩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불규칙한 드럼 루프와 끝없는 전자음에 빠져버리는 사이 엘-피의 랩은 신경 쓸 틈이 없으며, 역으로 리릭에 심취하는 사이 화려한 폭파음의 감상은 어려워진다. 엘-피 본인 역시 이러한 측면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몇 달 뒤 인스트루먼틀 앨범 [Fantastic Damage Plus]를 따로 발매하는 등 나름대로 팬들에게 서비스 차원의 배려(?)를 해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After Fantastic Damage

이후로도 엘-피는 데피니티브 젹스 레이블의 CEO로 활약하며 레이블에서 발매되는 모든 앨범마다 Executive Producer로 관여하고 있으며, 2002년 미스터 리프(Mr. Lif)와 2003년 멀스(Murs)의 앨범에서도 변함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등 레이블의 수장 겸 특급 프로듀서로 맹활약해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Fantastic Damage] 시절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비트를 양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빈번하게 들려오고 있다. 2004년 자신의 아버지께 바치는 재즈 앨범 [High Water]를 발매하고 미공개 트랙들을 모아놓은 앨범 [Collecting the Kid]를 선보이며 작년 한 해도 나름대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필자와 같이 [Fantastic Damage] 시절의 화려한 사운드의 향연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오히려 실망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다행히 올 초엔 고스트페이스(Ghostface)와의 공동작업을 해내고, 최근엔 퍼셉셔니스츠(Perceptionists)의 앨범에 수록된 12곡 중 3곡의 비트메이킹을 맡아 그럭저럭 괜찮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등 서서히 예전의 막강한 모습을 되찾는 것 같다.

발매된지 근 3년이 지났지만 [Fantastic Damage]에서 보여줬던 엘-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언젠가 또다시 청자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어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담고 있는 것 같다. 70여분의 시간으론 성이 차지 않는 양 끝없이 토해내던 분노의 랩핑과 충격적이었던 노이즈의 향연이 그 이유이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후속 앨범에서는 사운드와 리릭의 확실한 조화가 이루어지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자 El-P가 풀어야 할 과제일 것임을 누구보다도 엘-피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