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 Posted by epmd 2011. 5. 14. 16:06

Chino XL - No Complex, Nunca



Chino XL - No Complex


Chino XL - Nunca

나도 그랬듯이 국내에서는 대부분 지누션 3집에 참여했던 것을 계기로 그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고2에서 고3으로 올라갈 무렵, 지누션 앨범 테잎을 사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듯이 말이다.
앨범 주인공들보다 몇 갑절은 멋지게 잘 하는 게스트였는데.

치노는 노터리어스 비아이지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최고의 디스곡 "Hit 'Em Up"에서 투팍에게 호되게 까인 적이 있다.
그래서 치노 엑셀 얘기가 나왔다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Chino XL, Fuck You, Too'를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곤 하는데...
장난인 건 알지만, 최고의 랩 스킬을 보유한 인물이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

여하튼 치노 엑셀이 다시 생각나서, 요즘 차 안에서 그의 앨범을 많이 듣는다.
위의 둘은 각각 1집, 2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Movie | Posted by epmd 2011. 5. 8. 01:35

영화 Kill Bill에서 오마쥬한 영화


Everything Is A Remix: KILL BILL from robgwilson.com on Vimeo.



이 정도로 오마쥬한 작품이 많았는지 몰랐다. 정무문은 수십번을 봤던 영화였는데 저 장면에서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소개된 모든 영화가 오마쥬의 대상이었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80% 이상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니 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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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하려다 실패한(!) 글.

비트너츠(The Beatnuts)는 어느덧 데뷔 햇수로 20년을 앞두고 있는 노장 힙합 프로덕션 듀오이다. 참신한 비트와 향락적인 가사로 발표하는 앨범마다 "수작" 혹은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아왔던 그들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빚어낸 작품은 절반 이상이 절판되었고, 특히 '90년대의 앨범은 대체로 구하기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인지 한 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너츠의 국내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꽤 낮은 편이다. 'World's Famous'를 밥 먹듯이 외치던 그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통해 힙합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시대에 맞춰 변화를 거듭해온 이 위대한 힙합 듀오를 소개하려 한다.

초기 - 결성 과정과 데뷔 EP, 그리고 첫 정규 앨범.
주주(JuJu 혹은 Junkyard Ju-Ju)와 사이코 레스(Psycho Les)는 뉴욕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힙합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0대 때부터 디제잉과 랩을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둘은 각각 도미니칸-아메리칸, 콜롬비안-아메리칸인데, 이러한 배경은 훗날 이들의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되기도 한다. 지인의 소개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재주꾼은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가 그들을 네이티브 텅(Native Tongues) 패밀리에게 소개하게 되면서 인지도를 넓힐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제 3의 멤버 쿨 패션(Kool Fashion, 나중에 솔로로 데뷔하면서 알 타릭(Al' Tariq)으로 개명)을 만나게 되고, '90년대 초반에는 커먼(Common)이나 너티 바이 네이처(Naughty By Nature)처럼 꽤 굵직한 이름값을 가진 힙합 뮤지션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여러 차례 참여했다.
'92년, 비트너츠는 데뷔 앨범의 발매를 앞두고 있었으나, 쿨 패션이 마약 소지와 관련하여 유죄 선고를 받는 바람에 계획이 뒤틀리게 된다. 결국 데뷔 앨범 [Intoxicated Demons The EP]는 레이블을 옮기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치면서 '93년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지금도 비트너츠 하면 떠오르는 향락적인 가사의 향연은 데뷔 앨범부터 굳어진 스타일이었고, 재즈 샘플링에 충실한 비트 역시 데뷔 때부터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짤막한 러닝 타임의 EP에 이어 이듬해 등장한 정규 앨범 [Street Level]은 전작의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는 작품이었다. 팝 적인 느낌의 코러스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거리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 앨범을 끝으로, 제 3의 멤버 쿨 패션은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되면서 알 타릭(Al' Tariq)으로 개명하고 솔로로 전향한다. 물론, 주주와 사이코 레스와는 계속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기에 훗날 서로의 앨범에 참여하며 변치 않는 우정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중기 - 상업적 노선을 타다.
비트너츠의 앨범이 본격적으로 에픽(Epic)이나 소니(Sony)와 같은 대형 배급사를 통해 발매된 것은 '97년부터이다. '97년 발매한 [Stone Crazy]가 그 출발점인데, 비트너츠와 마찬가지로 라티노(Latino) 계열의 뮤지션인 빅 퍼니셔(Big Punisher 혹은 Big Pun)와 쿠반 링크(Cuban Link)가 참여한 싱글 "Off The Books"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인스트루먼틀 앨범 [Hydra Beats, Vol. 5]와 리믹스 앨범 [Remix EP: The Spot]을 발매한 비트너츠는 '99년 [A Musical Massacre]를 통해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힙합의 본질적인 모습에 충실하면서도 폭넓은 사운드 스케이프를 추구한 이 앨범은 "Watch Out Now"라는 싱글이 위용을 떨쳤다. 빌보드 앨범 차트 35위에 오르며 그들의 커리어를 통틀어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고, '99년을 대표할만한 힙합 앨범의 반열에 오르며 상업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쟁취한 작품으로 남는다.
하지만, 2001년의 [Take It or Squeeze It]과 두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마지막으로 비트너츠와 대형 레이블 간의 계약은 끝을 맺는다. 여전히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라틴 음악의 향기로 가득한 [Take It or Squeeze It]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실패한 앨범(미국 내 15만 장 이상 판매)이 되고 만다. [A Musical Massacre]에 수록된 히트곡의 리믹스 버전인 "Se Acabo (Remix)"에 반가운 이름 메소드 맨(Method Man)이 참여하고, 비트너츠의 초창기 멤버였던 알 타릭까지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았으나, 만족할만한 판매고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후기 - 2002년부터 현재까지의 활동.
Loud 레이블과의 계약 만료 후 비트너츠는 언더그라운드 씬으로 회귀한다. LandSpeed 레코드와 계약하고 발매한 [The Originators]는 그들의 역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코메가(Cormega), 라지 프로페서(Large Professor), 그리고 전작에 이어 다시 참여한 알 타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뮤지션의 참여가 눈에 띄었지만,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기에 상업적인 재미를 보진 못했다.
LandSpeed를 떠나 2004년에 Penalty 레코드에서 발매한 [Milk Me]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앨범이었다. 앨범 발매 전부터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를 잘근 잘근 씹어낸 앨범'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뚜껑을 열어 보니 실제로 제니퍼 로페즈를 디스(Diss)하는 트랙이 실려 있었다. 제니퍼 로페즈의 "Jenny from the Block"이라는 곡이 비트너츠의 히트곡 "Watch Out Now"와 동일한 샘플을 사용했다며 프로듀서인 트랙마스터스(Trackmasters)와 코리 루니(Cory Rooney)를 비난하고, 제니퍼 로페즈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Confused Rappers"라는 곡 덕분인지, 앨범은 적잖은 화젯거리를 몰고 다니며 짭짤한 흥행 수익을 거두었다. 한편, [Milk Me]는 랩퍼들 뿐만 아니라 키보드, 기타, 베이스 등의 세션 뮤지션들을 두루 기용하면서, 기존의 앨범과 달리 리얼 연주의 비중을 높이고 샘플링의 빈도를 줄이는 식의 실험이 이루어진 앨범이기도 하다.
[Milk Me]를 끝으로, 비트너츠의 스튜디오 작업 활동은 꽤 뜸해진 상태이다. 물론, 힙합 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사이코 레스는 2007년 [Psycho Therapy]라는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08년에는 비트너츠의 미공개 트랙 모음집 [U.F.O. Files]가 공개되기도 했다. 2010년 초에는 [Planet of the Crates]라는 타이틀의 앨범이 등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2010년 9월 현재까지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비트너츠의 음악 세계
앞서 언급했듯이, 비트너츠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게 진화를 거듭한 프로덕션 팀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초기의 앨범과 이후의 앨범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즉, [Street Level]에서 느껴지던 '90년대 중반 특유의 raw한 느낌을 2001년의 [Take It or Squeeze It]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초창기에 재즈에 기반을 둔 샘플링이 주를 이룬 반면, 90년대 후반부터는 라틴 음악의 정취를 그윽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후 그들은 리얼 연주 영역까지도 실험을 서슴지 않았다.
비트너츠가 만드는 비트가 특별한 이유를 단번에 설명하기란 어렵다. 몇몇 곡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나을 듯한데, 먼저 [A Musical Massacre]의 "Beatnuts Forever"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이 곡은 타 힙합 앨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드럼 운용 속에서도 힙합 특유의 그루비함을 전혀 잃지 않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The Originators]에 수록된 "Buying out the Bar"가 안겨다 주는 흥겨움은 또 어떠한가. 비트너츠의 대표곡 "Watch Out Now"가 지닌 매력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청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비트너츠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참신함이나 창조성만큼은 그 어떤 힙합 프로덕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던 이 듀오가 후배 뮤지션들에게 모범 사례로 영원히 남길 바란다.

Beatnuts Discography
Intoxicated Demons The EP (1993)
Street Level (1994)
Stone Crazy (1997)
Hydra Beats, Vol. 5 (1997)
Remix EP: The Spot (1998)
A Musical Massacre (1999)
World Famous Classics (1999)
Take It or Squeeze It (2001)
Beatnuts Forever (2001)
Classic Nuts, Vol. 1 (2002)
The Originators (2002)
Milk Me (2004)
U.F.O. Files (2008)
Article/Artist | Posted by epmd 2011. 5. 8. 01:19

KRS-One - 20여 년의 힙합 외길 인생


※ 2009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본명 로렌스 파커(Lawrence Parker) 보다는 크리스 파커(Kris Parker) 혹은 KRS-One 등의 스테이지 네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케이알에스-원(KRS-One, 이하 KRS)은 뉴욕 브롱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디제이 스캇 캇 라 록(DJ Scott La Rock)과 함께 부기 다운 프로덕션(Boogie Down Productions, 이하 BDP)이란 이름으로 힙합 씬에 뛰어들었고, 그들의 데뷔작 [Criminal Minded] (1987)는 훗날 '최초의 하드코어 힙합 앨범'이라는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남는다. 스캇 라 록의 죽음 이후에도 KRS는 동생 케니 파커(Kenny Parker), 디-나이스(D-Nice) 등을 멤버로 끌어들여 BDP를 이끌었고, '90년대 초반까지 5장의 정규 앨범을 제작했다.

솔로 커리어의 시작
'92~'93년 무렵, BDP의 수장이었던 KRS는 [Sex and Violence] 앨범을 끝으로 그룹 활동을 그만두고 솔로로 전향한다. '80년대의 끈끈했던 결속력을 상실한 BDP의 어수선한 모습은 그가 솔로 활동으로 선회할 시기가 왔음을 암시하는 것과도 같았다. 레이블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기에 솔로 전향 후에도 자이브(Jive)에서 앨범 발매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만든 초창기 두 앨범을 통해 그는 아직 대중에게 보여줄 것이 많음을, 그리고 건재함을 증명한다.

솔로 커리어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Return of the Boom Bap]과 [KRS-One]은 현재 KRS-One의 모든 앨범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메인 프로듀서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 그리고 키드 카프리(Kid Capri), 쇼비즈(Showbiz)와 함께 작업한 [Return of the Boom Bap]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를 연상케 하는 힘찬 앨범이었다. 셀프 타이틀이기에 간혹 KRS의 첫 솔로 앨범으로 오해받곤 하는 [KRS-One]에서도 프리미어의 흔적 -무엇보다도 KRS의 후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와 프리미어의 비트가 버무러진 "MC's Act Like They Don't Know"- 을 찾아볼 수 있으며, 다스 이펙스(Das EFX),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 매드 라이언(Mad Lion)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같은 시기 KRS는 채널 라이브(Channel Live)의 앨범 제작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자이브에서의 마지막 정규 앨범인 [I Got Next] (1997)는 KRS의 솔로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대중 친화적'인 앨범이었다. 펑크 그룹의 음원을 샘플링한 싱글 "Step into a World", 퍼프 대디(Puff Daddy)가 함께했던 동명의 리믹스 트랙, 레드맨(Redman)이 피쳐링한 'Heartbeat'는 기존의 KRS와는 확실히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그의 수많은 앨범 중에서 유일하게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진입했던 앨범이기도 하다.

자이브(Jive)와의 작별 이후
KRS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면 '97년 [I Got Next] 발매 후 베스트 앨범 [A Retrospective]가 발매되었을 뿐 2001년까지 약 4년의 공백기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KRS는 자이브의 A&R 업무를 맡고 있었다. 2001년 자이브에서 사임한 후부터는 메이저 레이블과의 계약에서 멀어지게 되고, 본격적으로 연간 1장 이상의 새 앨범을 찍어내는 왕성한 활동이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2001년부터 2009년 현재까지의 앨범 중에는 범작으로 분류되는 앨범이 많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약한 비트가 가득했던 [The Sneak Attack] (2001), 랩과 가스펠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던 [Spiritual Minded] (2002), BDP 시절의 명곡 "Illegal Business"의 새로운 버전을 수록했지만 엉성한 앨범 구성으로 빈축을 사야 했던 [Keep Right] (2004) 등은 '80 ~ '90년대 그가 일궈냈던 걸작의 향연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실망스러운 앨범이었다. 나스(Nas)의 [Hiphop is Dead]에 전적으로 반박하는 앨범으로, 그리고 '80년대 BDP 시절 대립구도를 형성했던 말리 말(Marley Marl)과의 합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Hip-Hop Lives] (2007)는 멋진 뮤직비디오와는 대조적으로 그저 그런 완성도를 갖추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개인적으로 2001년 이후 KRS가 만든 가장 훌륭한 앨범은 2003년 작 [Kristyles]라고 생각한다. 다 비트마이너즈(Da Beatminerz), 디제이 레볼루션(DJ Revolution) 등의 프로듀서가 그와 호흡을 맞춘 가운데,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견해, 물질 만능주의, 자신만의 힙합 철학 등을 읊조리는 [Kristyles]는 특이하게도 국내에서 라이선스 발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후에 만든 앨범의 대부분이 이만한 완성도를 갖추지 못하고 범작으로 분류되곤 하는 것이 현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가끔 '힙합 선생' 보다는 '앨범 공장장'에 가깝다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Side Project
1. 채널 라이브(Channel Live) 앨범 제작
그는 랩 듀오 채널 라이브(Channel Live)의 데뷔 앨범 [Station Identification]의 제작 과정에서 메인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채널 라이브를 대표하는 플래티넘 싱글 "Mad-Izm"에서는 랩 세션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2. 그룹 테라피(Group Therapy)
KRS는 나스(Nas), 알비엑스(RBX), 비-리얼(B-Real) 등 뉴욕과 LA의 랩 뮤지션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진 슈퍼 프로젝트 그룹 떼라피의 일원이기도 했다. 싱글 "East Coast West Coast Killas"는 닥터 드레(Dr. Dre)의 앨범 [Dr. Dre Presents the Aftermath]에 수록되었다.

3. 영화 출연
랩 뮤지션들의 디스(Diss) 혈전을 다룬 비프(Beef) 시리즈에서 그를 찾아볼 수 있다. 많은 힙합 뮤지션이 카메오로 참여했던 추억의 영화 [Who's the Man?] (1993) 에서도 KRS를 발견할 수 있다.

4. KRS는 줄루 네이션(Zulu Nation)의 멤버이기도 하며, 힙합 문화를 장려하는 단체 템플 오브 힙합(Temple of Hiphop)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쉴 틈 없이 달려온 그에게 거는 기대
BDP 시절 동료 스캇 라 록의 사망, 넬리(Nelly)와 '#1'을 둘러싼 비프, 그리고 최근엔 의붓아들의 사망까지 그동안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그는 그러한 걸림돌에도 굴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난무하는 범작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음악 활동뿐만 아니라 힙합 문화의 전파에도 힘쓰고 있는 모습 자체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며, 그러한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솔로 커리어의 초기 시절처럼 완성도 높은 앨범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하여 언더그라운드 씬을 뒤흔들 수 있는 신작으로 컴백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 2009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힙합 선생 케이알에스-원(KRS-One, 이하 KRS)이 메이저 레이블인 자이브(Jive)를 떠나 언더그라운드를 주 무대로 삼은 지도 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빌보드 싱글/앨범 차트에서 선전하고 있는 뮤지션만을 바라본 이들에게 케이알에스-원이라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부기 다운 프로덕션(Boogie Down Productions, 이하 BDP)을 아는 이는 더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90년대 힙합 음악의 흔적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작금의 상황은 소위 말하는 골든 에이지의 향수에 심취했던 이들에겐 아쉬움만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이번엔 KRS가 속해 있던 BDP 크루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결성 과정 및 스캇 라 록(Scott La Rock)의 사망
BDP는 KRS가 뉴욕 브롱스의 무주택자 상담소의 카운슬러로 근무하던 디제이 스캇 라 록(DJ Scott La Rock)을 만난 것을 계기로 결성된다. 둘 다 브롱스의 토박이였기에 Bronx의 별칭에서 착안하여 'Boogie Down'이란 이름을 지었다. 친분을 쌓고 음악을 만들기로 한 이들은 비트 박서 디-나이스(D-Nice)의 자그마한 참여, 그리고 울트라마그네틱 엠씨스(Ultramagnetic MC's)의 주축이던 세드 지(Ced Gee)의 도움을 통해 첫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스캇 라 록 사후의 BDP - 1. [Criminal Minded] (1987)
현재 무대에서 활동하는 많은 뮤지션에게 적잖은 영감을 불어넣어 준, 힙합 역사에 길이 남는 앨범으로 추앙받는 BDP의 데뷔작 [Criminal Minded]는 발매 당시부터 크나큰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사우스 브롱스가 힙합의 태생지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South Bronx", 그리고 엠씨 샨(MC Shan)의 "The Bridge"에 대응하는 "The Bridge is Over"라는 곡으로 QB(퀸즈브릿지)의 전설적인 힙합 집단 쥬스 크루(Juice Crew)와 벌인 설전은 매우 유명하여, 현재 힙합 씬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디스(Disrespect Rap)의 시초라는 설이 있을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에이씨/디씨(AC/DC)의 기타 리프가 담긴 'Dope Beat'는 런-디엠씨(Run-DMC),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와 더불어 힙합과 록을 접목이라는 '80년대의 참신한 결과물 중 하나였고, "Remix For P is Free"에서 느낄 수 있는 '레게음악과 힙합의 융합'은 BDP의 차기작에서도 꾸준하게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러한 독특함뿐만 아니라, 사우스 브롱스에서 그들이 보고 느낀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가사를 통해 갱스터 래퍼들에게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더해졌기에 본 앨범은 힙합 역사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2. [By All Means Necessary] (1988)
1집 발매 후 디제이 스캇 라 록이 다른 이의 싸움을 말리다 본인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KRS가 BDP 크루의 중추적인 존재로 남는다. 프로듀스, 컷팅, 스크래칭을 담당하던 스캇 라 록의 공백을 KRS 본인과 그의 친동생 케니 파커(Kenny Parker)의 프로듀싱으로 메우는 가운데, '88년 BDP의 소포모어 앨범 [By All Means Necessary]가 완성된다. KRS 자신의 랩이 철학을 담아내는 도구임을 말하며 랩퍼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My Philosophy'를 비롯하여, 전작의 "Dope Beat"을 잇는 록 샘플링 트랙 "Ya Slippin'", 블랙 스타(Black Star)의 "Definition"으로 친숙해진 원-투-쓰리 코러스의 오리지널 버전을 감상할 수 있는 "Stop the Violence", 쿨 모 디(Kool Moe Dee), 에릭비 앤 라킴(Eric B. & Rakim) 등 당시 최고로 군림하던 타 뮤지션에 대한 존중과 함께 '나는 여전히 최고'라는 외침으로 당찬 포부를 밝히는 "I'm Still #1" 등이 수록된 2집은 전작 못잖은 화려한 잔칫상이었다. "Stop The Violence", "Illegal Business"와 같은 트랙은 KRS를 '선생' 혹은 '철학자'라는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고, 그러한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게 되었다.

3. [Ghetto Music: The Blueprint of Hip Hop] (1989)
앨범 커버 전반에 걸쳐 'Ghetto'라는 단어를 남발하다시피 하는 3번째 앨범에서도 BDP의 참신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가 여전한 가운데 이번엔 리얼 연주가 가미된 곡을 찾아볼 수 있기에 BDP의 실험 정신이 시들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Jah Rulez"와 같은 리얼 연주 트랙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 디-나이스의 비트 박스를 첨가한 곡("Breath Control")도 포함되었고, 데뷔 앨범부터 이어지던 레게리듬은 "Bo! Bo! Bo!"를 통해 계승된다. KRS는 당시 앨범 활동과 더불어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미국 유명 대학의 강사로 참여하는 등 사회 활동을 병행하곤 했다.

4. [Edutainment] (1990), [Sex and Violence] (1992)
BDP는 4집부터 위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작하는 곡의 세련됨이야 자연스레 높아졌지만, 예전만큼 참신하고 강력한 무언가를 느끼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강연을 녹음한 듯한 6개의 Exhibit이 존재하는 가운데, KRS의 사회에 대한 교훈적인 발언이 어김없이 이어지는 [Edutainment]는 이전보다 높은 차트플레이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라이브 앨범 [Live Hardcore Worldwide]를 거쳐 '92년 발매된 BDP의 5번째 작품 [Sex and Violence]는 KRS 위주의 프로듀싱에서 벗어나 프린스 폴(Prince Paul), 펄 조이(Pal Joey)의 조력으로 이루어진 앨범이었다. [Edutainment]의 "Blackman in Effect" 못잖게 강렬한 "Duck Down"으로 초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예전만큼 완성도 높은 앨범이라 평가받지는 못했다. 디-나이스, 자말-스키(Jamal-ski), 스카티 모리스(Scottie Morris) 등 기존의 여러 멤버가 빠지고 KRS와 케니 파커를 위시한 소수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 5번째 앨범을 끝으로 BDP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며, 이후부터 KRS는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멤버
KRS를 제외한 BDP의 멤버는 꾸준히 바뀌었다. 케이알에스-원, 디제이 스캇 라 록, 디-나이스의 데뷔 시절 포맷은 스캇 라 록의 죽음으로 불가피하게 수정이 가해졌고, 이후 케니 파커, 미즈 멜로디(Ms. Melodie), 스카티 모리스, 하모니(Harmony), 윌리 디(Willie D) 등 많은 멤버가 BDP를 거쳐 갔다. 정확한 해체의 원인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앨범 [Sex and Violence]의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멤버의 교체가 특히 잦았는데 이것이 BDP가 와해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루머가 있다.

글을 마치며
'80년대 힙합 뮤지션들의 결과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례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요즘이기에, '80~'90년대 힙합 음악을 즐겨 듣는 나와 같은 청자가 느끼는 아쉬움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BDP의 옛 앨범을 다시 들으니 그야말로 감회가 새롭다. 크루의 해체 과정이 썩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BDP가 만든 일련의 산물, 특히 초기 앨범은 계속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에, 보다 많은 힙합 리스너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07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스쿱(Skoob)과 크레이지 드레이지(Krazy Drayz)는 '88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동일한 학문(영문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연스레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다스 이펙스(Das EFX)라는 그룹명의 'Das'는 두 멤버의 닉네임인 Drayz와 Skoob에서, 그리고 'EFX'는 'effects'에서 따왔다고 한다. EPMD가 심사를 맡았던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비록 우승하진 못했지만 워낙 독특했던 랩 스타일이 PMD의 시선을 사로잡는 바람에 머지않아 이스트웨스트(Eastwest) Records와의 계약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데뷔 시절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유명한 일화이다. 특정 단어를 '-iggity'로 바꾼 가사(예를 들어 Riggity-row, liggity-love, diggity-doubt와 같은 형태)와 혀를 마구 놀리는 듯한 일명 'Tung-Twisting' 스타일의 랩을 유감없이 쏟아낸 데뷔작 [Dead Serious](1992)는 랩 계에 크나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앨범이었고,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힙합의 역사를 다루는 데에도 빠지지 않는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다스 이펙스만의 특이한 랩 스타일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싱글 "They Want EFX"가 앨범의 흥행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듬해엔 그들을 발굴한 EPMD도 획득하지 못한 플래티넘을 따내는 대성공을 거둔다.

팀버랜드 신발이 유난히 눈에 띄는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인 "Baknaffek", "Freakit" 등의 싱글이 수록된 2집 [Straight Up Sewaside](1993)에선 1집의 속사포 같은 랩과 "-iggity"가 난무하는 스타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랩의 속도를 늦추며 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Dead Serious]의 대성공 덕분인지 2집도 골드를 기록하며 흥행 성공을 이어갔다. 2년간의 공백 기간을 거쳐 다프 이펙스만의 스타일도 슬슬 식상해질 무렵 그들은 이지 모 비(Easy Mo Bee),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 피트 락(Pete Rock), 디제이 클락 켄트(DJ Clark Kent) 등의 프로듀서와 작업하며 걸출한 앨범으로 돌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5장의 정규 앨범 가운데 한국 힙합 리스너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Hold It Down]이다. 비록 앞서 발표한 두 앨범에 비해 판매량은 초라했지만, 스쿱과 크레이지 드레이지는 [Hold It Down]을 통해 스트릿 힙합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또 다시 3년의 공백 기간을 거쳐 만들어낸 [Generation EFX](1998)는 전작들과 확연히 대조되는 -전자음이 난무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시도와 레드맨(Redman), 에잇-오프(8-Off), PMD 등 게스트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히트 싱글의 부재로 결국 '실패한 앨범'이란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베스트 앨범을 거쳐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2003년에는 5번째 앨범 [How We Do]를 발표하지만, 시간의 공백이 너무나 컸는지 이 또한 사실상 '묻혀버린 앨범'이 되고 말았다.

결국 특이한 랩 스타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다스 이펙스라는 브루클린 랩 듀오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슬슬 잊혀 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힙합의 가사 측면에 있어 다스 이펙스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스타일 -특정 단어를 '-iggity'로 대체하는 특이한 가사와 횡설수설 이야기하는 넌센스 랩 등- 은 수년의 시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들어봐도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알게 모르게 많은 래퍼들이 모방했다고 하는 '-iggity' 랩과 매 앨범마다 컨셉으로 내세웠던 '하수도 문화', 그리고 그들이 즐겨 입었던 밀리터리 룩은 다스 이펙스를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것들로 팬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Article/Artist | Posted by epmd 2011. 5. 8. 00:55

EPMD - 훵키 힙합의 개척자들


※ 2007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2002년 디제이 혼다(DJ Honda)와 함께 방한했던 힙합 듀오 EPMD(이피엠디). 수년간 소문만 무성하던 EPMD의 재결합설이 작년 말부터 기정사실로 되면서 골수팬들의 마음은 벌써 들떠 있다. 이런 와중에 그들의 공적을 되짚어보는 유익한 시간을 가진다면 금상첨화가 되겠다는 생각에 EPMD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고자 한다.

초기시절 ~ '92년
뉴욕 출신의 '68년생 동갑내기 듀오 에릭 서먼(Erick Sermon a.k.a E-Double)과 패리쉬 스미스(Parrish Smith a.k.a PMD)가 EPMD-Erick and Parrish Making Dollars의 약자-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이다. '88년 Sleeping Bag 레이블과 계약하고 만들어낸 데뷔작 [Strictly Business]는 EPMD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앨범으로 손꼽히곤 한다. 그들은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릭 제임스(Rick James), 잽 밴드(Zapp Band),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의 음원을 적극 활용하며 데뷔 시절부터 완성도 높은 훵키 힙합 스타일을 선보였다. 쿨 앤 더 갱의 "Jungle Boogie"를 샘플링한 "You Gots to Chill"이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Rock Steady"를 활용한 "I'm Housin'" 등은 히트 싱글로서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곡이었고, 앨범은 골드 레코드(50만장 판매)가 되었다. '89년의 소포모어 앨범 [Unfinished Business]는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R&B/Hiphop 차트 1위를 석권하며 흥행몰이를 이어갔고, 당시 Sleeping Bag 레이블이 겪었던 재정난은 그들이 데프 잼(Def Jam)으로 적을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데프 잼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90년대 초반 만들어낸 [Business as Usual]과 [Business Never Personal] 또한 10여 년이 지난 지금 명작으로 일컬어지곤 한다(참고로 이 시절부터는 앨범 크레딧에서 디제이 스크래치(DJ Scratch)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Business as Usual]엔 엘엘 쿨 제이(LL Cool J)와 함께한 불후의 명곡 "Rampage", 레드맨(Redman)의 데뷔앨범에도 중복 수록된 "Hardcore" 등 양질의 곡들이 대거 담겨 있었고, 성적 발언이나 Wack MC에 대한 서슴없는 비난 등 거침없는 가사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그들의 6장의 앨범 가운데 유일하게 절판되어 현재 중고 앨범 사이트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Business Never Personal]에는 "Crossover"와 "Head Banger"와 같은 걸출한 싱글들이 포함되어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EPMD, 케이-솔로(K-Solo), 다스 이펙스(Das EFX), 레드맨, 허리케인 지(Hurricane G) 등으로 구성된 히트 스쿼드(Hit Squad) 패밀리가 탄생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해체와 재결합
EPMD는 '93년 초 돌연 해체를 선언했다(몇 해 전 더 소스(The Source)지에서 힙합 씬 150대 사건을 열거한 적이 있었는데, EPMD의 해체가 기록됐던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의 결별 선언은 정말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에릭과 패리쉬는 솔로 활동과 타 뮤지션 앨범 작업을 병행하며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EPMD 시절만큼의 흥행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두 남자는 '90년대 중반 각각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동시에 에릭 서먼은 레드맨과 키스 머리(Keith Murray)의 데뷔 앨범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다스 이펙스의 앨범은 PMD가 늘 크나큰 비중을 차지했다. '97년엔 다시금 의기투합하여 EPMD의 포맷으로 귀환하기도 하는데, 컴백 앨범 [Back in Business]는 "Never Seen Before", "Da Joint", 1집의 "You Gots to Chill"의 후속곡 격인 "You Gots to Chill '97" 등 그야말로 "EPMD 다운 트랙"으로 중무장하여 성공적인 컴백을 알렸다. 'EPMD - Erick and Parrish Millenium Ducats'라는 또 하나의 재미난 약자를 만들어내며 "Symphony 2000"과 같은 멋진 곡을 싱글 컷한 [Out of Business]를 끝으로, 그들은 '폐업(Out of Business)'이란 타이틀처럼 EPMD로서의 활동을 마감하는 듯했다.

또 한 번의 재결합
[Out of Business] 이후 둘은 또다시 솔로 활동과 외부 작업에 전념했다. 에릭은 제이(J) Record와 모타운(Motown)에서 무려 석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레드맨, 키스 머리와 함께 데프 스쿼드(Def Squad)의 앨범을 만들기도 했으며, PMD는 솔로 앨범 [The Awakening]의 제작과 디제이 혼다와의 합작에 주력하곤 했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일단락된 것 같았던 듀오의 재결합 소식이 들려온 것은 2006년 말이었다. 에릭과 패리쉬, 그리고 디제이 스크래치는 작년 10월 락 더 벨스(Rock The Bells) 투어에서 함께하며 EPMD의 재결합을 알렸고, 12월엔 키스 머리까지 합세하여 EPMD의 이름으로 "The Main Event"라는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머지않아 드러나게 될 새 앨범의 타이틀은 [We Mean Business]라고 한다. 흥행 성공의 여부를 떠나서 힙합 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두 거성의 새로운 행보에 관심을 갖는 것은 힙합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사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사족
1. 그룹 이름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EPMD를 에릭 서먼과 패리쉬 스미스만으로 이루어진 2인조 랩 그룹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초창기 시절엔 디제이 다이아몬드 제이(Diamond J)와 케이 라 보스(K La Boss)가 멤버에 포함되어 있었고, '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객원 멤버 디제이 스크래치를 포함한 3명의 그룹으로 간주하기도 한다([Back in Business] 앨범 부클릿을 살펴보면 셋이서 함께 찍은 사진도 찾아볼 수 있다). 항상 에릭과 패리쉬가 그룹의 주축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감초 역할을 하던 디제이들의 비중도 간과하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자리를 빌려 언급한다.

2. EPMD 1집의 "I'm Housin'"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이 [Renegades](2000, Epic)앨범에서 커버한 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 EPMD의 앨범 판매고를 살펴보면 플래티넘(100만장) 앨범이 없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매 앨범마다 골드를 기록했지만 플래티넘을 따내진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발굴해낸 다프 이펙스와 레드맨의 앨범 중엔 플래티넘을 획득한 앨범이 있다.

4. 현재 EPMD의 마지막 앨범으로 남아있는 [Out of Business]의 2번째 CD인 리미티드 에디션 앨범은 EPMD의 베스트 앨범이라 할 수 있는데, 단순한 'Greatest Hits'가 아니라 오리지널 버전을 재각색한 뉴 버전의 곡들이 6개나 수록된 앨범이다.


※ 2006년 or 2007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Before Organized Konfusion
오거나이즈드 컨퓨젼(Organized Konfusion, 이하 O.K)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우선 그룹 결성 이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프린스 포(Prince Po, 혹은 Prince Poetry)와 패로아 먼치(Pharoahe Monch)는 유년시절부터 퀸즈에서 함께 성장하며 같은 고등학교에 재학했던 절친한 사이였다. 2MC의 포맷이 완성되기 전 둘은 각각 랩과 비트박스를 하며 테잎을 몇 개 제작하곤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패로아 먼치도 랩퍼로서의 재능을 깨닫고 랩을 하기 시작했다. '88년 발매된 울트라마그네틱 엠씨스(Ultramagnetic MC's)의 데뷔 앨범 제작에 혁혁한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저명한 프로듀서 폴 씨(Paul C, 프린스 포의 말에 의하면 폴 씨는 자신이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의 눈에 띄어 헐리우드 베이직(Hollywood Basic)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까지, 프린스 포와 패로아 먼치는 심플리 투 파지티브 엠씨스(Simply II Positive MC's)라는 팀으로 활동했다. '87년엔 5곡이 담긴 데모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폴 씨와 연이 닿아 헐리우드 베이직과 계약한 후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Organized Konfusion'으로 활동하게 된다.

About Album
'89년, 두 남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물심양면으로 힘써줬던 폴 씨는 안타깝게도 24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지만 O.K의 커리어는 '90년대 초 마침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곡을 둘만의 힘으로 제작한 '91년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에는 앞서 언급한 심플리 투 파지티브 엠씨스 시절의 데모 앨범에 담긴 "Audience Pleasers", "Prisoners of War"가 재차 수록되었고, "Walk into the Sun" 등 네 곡이 싱글로 낙점되었다. 유년시절 패로아 먼치의 동네 친구였던 오씨(O.C.)가 참여한 "Fudge Pudge", "Releasing Hypnotical Gases", "Who Stole My Last Piece of Chicken?" 등 묵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재기 발랄한 랩으로 가득한 이들의 첫 앨범은 평단의 기립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3년 뒤 발매한 소포모어 앨범 [Stress: The Extinction Agenda]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만족할만한 수준의 판매고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알찬 내용물로 가득하여 명반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 번째 앨범 또한 대부분 두 멤버의 능력만으로 전반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탓에 벅와일드(Buckwild)의 참여 정도가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굵직한 외부인사의 이름이었다. 랩 세션 또한 큐-팁(Q-Tip)과 오씨가 참여한 "Let's Organize" 외엔 프린스 포와 패로아 먼치만의 목소리로 구성되었다. 재즈와 훵크 샘플을 대거 활용한 40여분의 러닝타임에서 "Stress",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들 것 같은 패로아 먼치의 변화무쌍한 랩이 돋보이는 "Bring it on"과 같은 싱글이 유명세를 탔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곡은 날아가는 총알을 1인칭 시점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Stray Bullet"이었다.

'97년 헐리우드 베이직에서 프라이어러티(Priority)로 적을 옮긴 뒤 공개한 3번째 앨범 [The Equinox]는 다소 산만한 구성과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세 앨범 중 가장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하지만 정작 프린스 포 본인은 이 앨범을 작업할 때가 가장 재밌었다고 회고한다). 다이아몬드 디(Diamond D), 라히드(Raheed), 벅와일드 등의 프로듀서가 참여했고, 두 멤버는 수많은 스토리텔링 스킷을 만들어냈다. 앨범은 완성도와 무관하게 전작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차트 성적을 기록했다.

해체 & 솔로활동
많은 사람들이 O.K의 해체 원인을 두 멤버의 불화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O.K 본인들은 와전된 소문이라고 말한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해체의 가장 큰 원인은 적합한 프로모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팬들은 항상 'O.K는 돕(dope)하지만 매번 적절한 프로모션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말해왔고, 그런 상황 속에서 결국 둘은 각자 솔로 활동을 통해 커리어를 이어가게 되었다.

먼저 솔로 앨범으로 돌아온 이는 패로아 먼치였다. '99년 당시 언더그라운드의 명가였던 로커스(Rawkus) 레이블을 통해 선보인 [Internal Affairs]는 화려한 참여진과(프린스 포도 "God Send"라는 곡에 참여하여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시켜줬다) 내면의 악랄한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린 것 같은 가사로 썩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 [Internal Affairs]를 끝으로 패로아 먼치의 솔로 앨범은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동안 프린스 포는 '04년과 '06년 각각 [The Slickness]와 [Pretty Black]이란 타이틀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2000년대 들어 셰이디 레코드(Shady Records), 배드 보이(Bad Boy) 등 여러 레이블과 무성한 계약설을 양산하던 패로아 먼치는 '06년 2월 -Akon의 [Konvicted] 앨범으로 유명한- SRC Records와 손을 잡았고, '07년 3월 현재 2번째 솔로 앨범의 발매가 임박한 상황이다.

한편, 프린스 포는 패로아 먼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O.K의 앨범을 다시 만들 계획이라고 했지만, 각자 솔로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판국이라 아직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그리고 두 멤버와 막역한 사이인 오씨가 O.K의 정식 멤버가 될 거라는 루머는 헛소문이라고 한다.


※ 2006년 or 2007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만약 올드스쿨 랩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이에게 쿨 모 디(Kool Moe Dee)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고 물었을 때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를 허풍쟁이로 의심해볼만하다. 뉴욕 출신의 1963년생 Mohandas Dewese는 'Kool Moe Dee'라는 이름과 포르쉐 디자인 선글라스를 필두로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랩 씬을 누볐던 올드스쿨 힙합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쿨 모 디의 화려한 솔로 커리어 이전에는 트리쳐러스 쓰리(Treacherous Three, 이하 T3)의 일원으로서의 활동이 있었다. 쿨 모 디와 엘에이 선샤인(L.A. Sunshine), 스페셜 케이(Special K), 그리고 디제이 이지 리(DJ Easy Lee)는 모두 고교 동창 사이였기에 자연스레 그룹을 결성하였다. '78년부터 지역 내 파티 등 그다지 크지 않은 무대에서 활동하던 T3는 스푸니 지(Spoonie Gee)에 의해 저명한 프로듀서 Bobby Robinson에게 소개되면서 싱글 앨범을 발매하며 인지도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The New Rap Language", "Feel the Heartbeat" 등 T3의 주옥같은 명곡들은 모두 이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쿨 모 디는 T3 멤버들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가운데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교 졸업 이후엔 솔로 데뷔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그가 섭외한 프로듀서는 훗날 흑인 음악 리스너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해진 인물인 테디 라일리(Teddy Riley)였다(당시 테디 라일리의 나이는 17세였고, 지금처럼 많은 이에게 알려진 상태가 아니었다). 테디 라일리의 프로듀싱이 빛을 발한 "Go See the Doctor"가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86년, 쿨 모 디는 마침내 메이저 레이블 자이브(Jive)와 계약하고 첫 솔로 앨범 [I'm Kool Moe Dee]를 발매했다.

이듬해인 '87년은 그의 음악 인생에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 '87년을 수놓은 2집 [How Ya Like Me Now]는 전작에 이어 테디 라일리의 조력이 바탕이 된 가운데 "Wild Wild West", "No Respect" 등 썩 괜찮은 트랙들이 대거 수록되어 현재까지도 그의 모든 정규 앨범을 통틀어 가장 높은 완성도를 갖췄다는 평을 듣는 명작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앨범이 플래티넘을 획득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엘엘 쿨 제이(LL Cool J, 이하 LL)와의 비프가 있었다는 점이다. 쿨 모 디는 LL이 자신의 공격적인 랩 스타일을 훔쳤다고 주장하며 지프(Jeep)차가 당시 LL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빨간색 캉골 모자를 짓누르고 있는 모습을 [How Ya Like Me Now] 커버에 담고, LL을 'lackluster, lower-level, last, least, limp lover'이라 맹비난하는 등 다양한 가십거리를 양산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결과적으로, 이러한 갈등 구도는 앨범 판매량에 큰 영향을 미치며 쿨 모 디와 LL의 둘 모두에게 이익으로 작용한 셈이 되었다). 이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여 지금까지도 쿨 모 디의 이름이 거론될 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고 한다.

'89년엔 세 번째 앨범 [Knowledge is King]을 발매했는데, 앨범에 수록된 "I Go to Work"는 쿨 모 디 특유의 스피디하고 박력 넘치는 랩이 유감없이 발휘된 명곡이란 찬사를 듣게 되었다. 전작보다는 떨어지지만 판매량은 골드(50만장)를 기록하며 썩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같은 해 케이알에스-원(KRS-One)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던 'Stop the Violence' 운동에 합세하고,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불후의 명작 [Back on the Block]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허나 안타깝게도 쿨 모 디의 솔로 커리어는 3집 이후부터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린다. '91년 [Funke, Funke Wisdom]으로 돌아왔을 때, 찬란했던 전작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자이브는 '93년 베스트 앨범을 끝으로 그를 방출했다. '94년엔 T3의 재결합 앨범 [Old School Flava]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음과 동시에 디제이 이지 리가 운영하는 레이블을 통해 5번째 솔로 앨범 [Interlude]를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는 이미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 버린 상태였다.

결국 쿨 모 디의 솔로 앨범은 [Interlude]를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99년에는 Will Smith 주연의 영화 [Wild Wild West] OST에 참여해 [How Ya Like Me Now]에 수록된 자신의 동명의 곡을 활용하고, 2003년엔 [There's a God on the Mic]라는 책을 출판하는 등 '90년대 중반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으나,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쿨 모 디라는 인물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올드스쿨 래퍼'라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쿨 모 디가 출연한 영화
Listen Up: The Lives of Quincy Jones (1990) .... Himself
Strapped (1993) (TV) .... Gun Dealer
Panther (1995) .... Jamal
Gang Related (1997) .... Lionel Hudd
Storm Trooper (1998) .... Driver
Cypress Edge (1999) .... Agent Armstrong
Brother (2000) .... Jack
Out Kold (2001) .... Blackie
Crossroads (2002) (as Kool Mo Dee) .... Bar Owner
The New Guy (2002) .... Ted


※ 2006년 or 2007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뉴욕 베이쇼어(Bay Shore) 출신의 1968년생 에릭 서먼(Erick Sermon)은 80년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활동 중인 얼마 남지 않은 힙합 뮤지션 중 하나이다. 엘엘 쿨 제이(LL Cool J), 엔 보그(En Vogue),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 제이-지(Jay-Z) 등 걸출한 뮤지션들과의 콜라보도 무척 많았지만 외부 활동을 제외한 그의 주된 행보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것은 그룹 EPMD(with Parrish "PMD" Smith)로서의 활동, 솔로로서의 활동, 마지막으로 데프 스쿼드(Def Squad)로서의 활약이다.

1. Erick Sermon of EPMD
EPMD 듀오로서의 활동은 긴 말이 불필요한 에릭 서먼 최고의 업적이다. '88년 [Strictly Business]부터 시작하여 '92년까지 넉 장의 앨범을 발매한 뒤 돌연 해체를 선언하고 각자 개인 활동에 주력하다 '97년 [Back in Business]로 재결합하고 '99년 [Out of Business]를 끝으로 그룹 활동을 완전히 마감할 때까지, 그들의 음악은 수많은 힙합 리스너를 매료시켰다. 특히나 에릭 서먼은 프로듀서 측면에서 볼 때 EPMD의 앨범과 자신의 솔로 앨범을 통해 힙합의 필수 불가결 요소인 샘플링을 적극 활용하여 훵키한 분위기를 유도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명성에 비해 매번 판매량은 썩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동했거나 혹은 계속해서 활동 중인 많은 뮤지션이 각종 매체를 통해서 EPMD에 대한 존경이나 음악적 영감 등을 피력하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힙합 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지레 짐작이 갈 것이다.

2. As a Solo
'92년 EPMD의 해체 선언 이후 에릭 서먼은 Def Jam을 통해 이듬해 첫 솔로 앨범 [No Pressure]를, 그리고 '95년 [Double or Nothing]을 발매하며 불타는 창작열을 과시한다(참고로 PMD는 한발 늦은 '94년에 첫 솔로작 [Shade Business] 발매). 여전히 훵키한 비트로 점철된 두 앨범에선 싱글 컷 된 "Stay Real", "Bomdigi", "Welcome"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나 에릭 서먼이 발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랩퍼 레드맨(Redman)과 키스 머리(Keith Murray)는 이 시절부터 매번 에릭 서먼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며 끈끈한 동료애를 보여준다.

재결합 후 또다시 해체하게 된 EPMD로서의 행보 이후 그는 제이 레코드(J Record)와 계약을 맺고 2001년 3번째 솔로 앨범 [Music]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타이틀곡 "Music"은 에릭 서먼이 런던의 소규모 음반 매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마빈 게이(Marvin Gaye)의 LP에서 따낸 보컬을 활용한 곡이었는데(원곡은 마빈 게이의 1982년작 [Midnight Love]의 "Turn on Some Music"), 당시 R&B 차트 2위까지 진입하는 등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2002년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의 조력으로 만들어진 중독성 강한 트랙 "React"를 위시한 양질의 곡들을 두루 갖춘 앨범 [React]를 끝으로, 그는 제이 레코드에서 방출당하는 아픔을 겪는다(앨범 발매 년도는 2002년, 방출된 시기는 2003년). 단지 저조한 판매량이 방출당한 이유였다. 허나 그런 와중에도 에릭 서먼은 창작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고, 당시부터 제작하기 시작했던 곡들을 모아 2004년 말 모타운(Motown)을 통해 [Chilltown, New York]을 공개한다. 기존의 에릭 서먼 답지 않게 다소 가벼운 듯한 느낌의 5번째 앨범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솔로 앨범은 없을 것이라 공언하여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3. As a Member of Def Squad
레드맨은 클럽 DJ로 활동하다 에릭 서먼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키스 머리 역시 '94년 에릭 서먼에 의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고 한다(키스 머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인 "The Most Beautifullest Thing in This World"를 프로듀스한 인물 역시 에릭 서먼이었다). 사실상 에릭 서먼이 발굴해낸 후배 뮤지션들이라 할 수 있는 둘은 -에릭 서먼을 포함하여- 당시부터 줄곧 각자의 앨범 제작에 상당 부분 참여하거나 공동 투어 등을 전개하며 상부상조하는 모습을 보여 왔는데, 이들은 '98년과 2000년 프로젝트 그룹 데프 스쿼드로서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El Nino]는 첫 싱글 "Full Cooperation", 비즈 마키(Biz Markie) 피쳐링의 "Rhymin' Wit' Biz", 그리고 힙합 클래식 "Rapper's Delight"을 6분여의 대곡으로 각색한 "Def Squad Delite"가 앨범을 대표할만한 트랙으로 그 입지를 굳혔고, [Def Squad Presents... Erick Onasis] 앨범은 디제이 퀵(DJ Quik), 엑지빗(Xzibit), 투 숏(Too $hort), 고(故) 이지-이(Eazy-E) 등 웨스트 뮤지션의 참여로 화제를 모았다. 두 앨범의 제작 역시 에릭 서먼의 크나큰 비중 하에 이루어졌다.

4. etc.
이외에 히트 스쿼드(Hit Squad)로서의 활동이나 타 뮤지션들과의 다양한 조우까지, 에릭 서먼은 근 20년간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해왔다. 그가 일궈낸 일련의 산물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우선 그만큼 샘플링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프로듀서는 참 드물다는 생각이 들고, 힙합 키즈들이 알게 모르게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두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에릭 서먼은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의 신작 [Big Bang]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메소드 맨(Method Man)의 신보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등 올해도 식을 줄 모르는 창작 욕구를 과시하는 중이다. 2004년 5번째 솔로 앨범 [Chilltown, New York]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던 앨범 발매는 데프 스쿼드의 세 번째 앨범을 통해 재개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위를 떠나서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노장의 끊임없는 활약에 박수를 보내며 동시에 차기 행보에도 주목할 필요성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