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4. 22:28

7L & Esoteric [A New Dope] (2006)


※ 2006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1. Get Dumb
2. Everywhere
3. Feel the Velvet
4. 3 Minute Classic
5. Daisycutta (feat. Kool Keith)
6. Eso Ain't Shit
7. Dunks Are Live, Dunks Are Dead
8. A.O.S.O.
9. Cemetery
10. Reggie Lewis Is Watching
11. Girls Gone Wild (Then & Now)
12. Most
13. Take Note
14. Perfect Person
15. Play Dumb

Record Label : Babygrande
Released Date : 2006-06-27
Reviewer Rating : ★★★

롱런하는 뮤지션의 음악 행보 어딘가에서는 한번쯤 변화의 물결이 요동치곤 한다. 기존의 사운드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최신 트렌드에 발맞추려 하는 경우는 최근 들어 그 예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고, 어떤 뮤지션은 데뷔 이전부터 꿈꿔왔던 이채로운 모습으로 돌변하기도 하며, 또 어떤 그룹은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여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지금 소개하는 세븐엘 엔 에소테릭(7L & Esoteric)의 2006년 작 [A New Dope]은 변화를 시도하는 힙합 듀오의 좋은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 물론 구체적으로 파고들자면 단순히 자그마한 변신이 아닌 180도 달라진 모습이기에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변화의 중심은 프로듀서 세븐엘(7L)이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세븐엘의 비트라 하면 피아노 루프와 턴테이블 리릭 훅(Hook) 처리 등을 통해 표현되는 어두운 분위기, 그리고 에소테릭(Esoteric)의 정박 랩을 받쳐줄만한 적당한 BPM 등이었는데, 본 작을 듣는 순간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힙합인지 테크노인지 IDM인지 분간하기 힘든 오묘한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에 접할 수 없었던 전자음의 향연이 주를 이루는 업템포 사운드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세븐엘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앨범 타이틀에 걸맞게 에소테릭의 랩 또한 변화의 예외가 되진 않는다. 전 작 [DC2 : Bars of Death]에서부터 변화의 기미를 조금씩 느낄 수 있었기에 세븐엘의 그것만큼 충격적이진 않지만, '펀치라인의 공장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EP ~ 2집 시절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는 판국이다. "Dunks Are Live, Dunks Are Dead"와 "Daisycutta"에서의 동일 단어를 두 번씩 반복하는 랩이나 "Feel the Velvet"의 나사 풀린 듯 느슨한 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쏘아붙이기 전문가' 에소테릭의 그것이 아니었다. 에소테릭은 모 웹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제는 랩 배틀이 질린다(I can't write anymore battle raps and I'm bored to death with it...)'라고 실토하기도 했는데, 그러고 보면 그의 변신에는 다 마땅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변화의 시도 자체는 좋다. 하지만 막상 끝까지 듣고 있으면 180도 달라진 두 남자의 신작을 멋지다고 치켜세우기도 모호한 노릇이다. 어마어마한 BPM을 자랑하는 쿨 키스(Kool Keith) 피쳐링의 첫 싱글 "Daisycutta"는 강력한 중독성만큼이나 만족스런 트랙이지만, 나머지 곡들 대부분은 도대체 무슨 이유를 대고 돕(dope)하다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중간에 자연스럽게 선회하는 비트를 통해 참신한 전개를 주 무기로 삼은 "Dunks Are Live, Dunks Are Dead"와 "A.O.S.O.", 앨범 중간 중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던 세븐엘의 찰랑거리는 드럼 등은 분명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변화의 최첨단에 서 있는 트랙 대다수가 이렇다 할 강력함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세븐엘과 에소테릭의 옛 모습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게 재현되는 "Reggie Lewis Is Watching"과 "Take Note"가 귀에 착착 감긴다. 이들의 옛 모습에 너무나 익숙한 탓인지 나를 포함하여 이들을 오래전부터 지지해온 사람들 대부분은 "Take Note"를 듣는 순간 에소테릭의 날카로운 랩에 열광하고 세븐엘의 비트에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이 이번 앨범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궁극적인 모습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옛 추억에 잠기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세븐엘과 에소테릭이 직면한 현 상태는 같은 레이블 베이비그랑데(Babygrande) 소속의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Jedi Mind Tricks, 이하 JMT)가 [Visions of Gandhi] 발매 당시 겪었던 상황과 무척 흡사하다. [Visions of Gandhi]는 절대 성의 없게 만든 앨범이 아니었지만, 기존의 색깔을 배재한 채 나타났던 JMT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세븐엘과 에소테릭의 현 상황도 JMT가 처했던 당시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두 남자의 변화를 지지하는 세력과 변신에 심각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나뉜 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아무리 들어도 dope하지 않은 이들의 결과물을 그다지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지지하기는커녕 행여나 차기작마저 이러한 실험 대상이 되는 건 아닌지 근심 걱정이 산더미처럼 생겨날 정도이고, 정말 그랬다가는 기존의 골수팬들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게 뻔해 보인다.

힙합 씬에 뛰어든 지도 어언 10년이 된 듀오이기에 한번쯤 변화를 꾀하는 것은 너무나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세븐엘과 에소테릭의 그것이 단지 한순간의 외도이길 바라게 되는 건 왜일까. 에소테릭은 정말 랩 배틀과 펀치라인 공장 풀가동에 염증을 느낀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제작 중인 솔로 앨범에선 부디 앙칼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고, 7L이 기획 중인 비욘더(Beyonder)와의 두 번째 프로젝트 앨범 역시 본래의 세븐엘 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New'하지만 절대 'Dope'하지는 않은 이들의 2006년 신작은 단지 한번쯤 시도하는 실험적인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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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face Killah [Fishscale] (2006)


※ 2006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1. The Return Of Clyde Smith (Skit)
2. Shakey Dog
3. Kilo (featuring Raekwon)
4. The Champ
5. Major Operation (Skit)
6. 9 Milli Bros. (featuring Wu Tang Clan)
7. Beauty Jackson
8. Heart Street Directions (Skit)
9. Columbus Exchange (Skit) / Crack Spot
10. R.A.G.U. (featuring Raekwon)
11. Bad Mouth Kid (Skit)
12. Whip You With A Strap
13. Back Like That (featuring Ne-Yo)
14. Be Easy (featuring Trife)
15. Clipse Of Doom (featuring Trife)
16. Jellyfish (featuring Capadonna, Shawn Wigs & Trife)
17. Dogs Of War (featuring Raekwon, Trife, Capadonna & Sun God)
18. Barbershop
19. Ms. Sweetwater (Skit)
20. Big Girl
21. Underwater
22. The Ironman Takeover (Skit)
23. Momma featuring Megan Rochell
24. Three Bricks (featuring The Notorious B.I.G. & Raekwon)

Record Label : Def Jam
Released Date : 2006-03-28
Reviewer Rating : ★★★★

나를 비롯하여 힙합 음악을 접하는 많은 이들에게 언제부터인가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 이하 Ghost)라는 인물은 항상 평작 혹은 그 이상의 결과물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는 유능한 존재로 각인되어 왔다. 별다른 기복 없이 양질의 앨범만을 만들어온 베테랑이란 사실을 부인할 이가 아무도 없을 만큼 자신의 입지를 꿋꿋이 다져왔던 Ghost이다보니 이런 이미지가 굳어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만 말이다. 덧붙여서 '우-탱의 유일한 생존자', 'King of New York' 등 미디어와 평단이 만들어낸 수식어들만 봐도 우리가 매번 Ghost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단 점이 괜한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런 그가 2004년 4집 [Pretty Toney Album]과 시어도어 유닛(Theodore Unit)의 [718]의 발매에 이어 작년엔 트라이프(Trife)와의 듀오 앨범 [Put It on the Line]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전개해온 앨범 제작 활동 속에서 올해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팬들을 만족시키고자 [Fishscale]이란 타이틀의 앨범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Fishscale]을 여러 차례 들으면서 느낀 점을 아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Ghost가 이번엔 자신의 모든 팬들을 만족시키고자 팔을 걷어붙였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단짝 래퀀(Raekwon)과의 조우가 그리웠던 이들에겐 "Kilo", "R.A.G.U." 등을 통해 지난 추억들을 재현할 수 있게 하였고, 매번 우-탱 멤버들의 솔로 앨범마다 적어도 1곡 이상 수록되곤 하던 우-탱 클랜의 '떼창'은 본 작에선 "9 Milli Bros."라는 곡에 주요 멤버 전원이 참여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시켰다(심지어는 죽은 올 더티 바스타드(Ol' Dirty Bastard)의 목소리까지 수록되었다). Ghost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시어도어 유닛을 열렬히 지지하는 팬들을 향한 배려("Jellyfish", "Dogs Of War")도 잊지 않았으며, 작년 발매된 [Put It on the Line]의 여운이 남는 이들을 위해 트라이프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콤비플레이("Clipse of Doom")도 또다시 맛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데프 잼(Def Jam)의 신성 니-요(Ne-Yo)가 참여한 첫 싱글 "Back Like That"으로 대중에게 쉽게 어필하고자 하였으며, 엠에프 둠(MF Doom)의 손을 거쳐간 곡이 여럿 수록되어 Ghost와 둠이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본 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 피트 락(Pete Rock), 제이 디(Jay Dee) 등 걸출한 프로듀서진을 게스트로 대거 동원한 것도 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 한 장의 앨범에 담으려 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이처럼 화려하게 차려놓은 밥상은 그 맛도 일품이다. 거장 피트 락의 프로듀싱이 빛나는 "Be Easy"는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벽하며, 저스트 블레이즈의 시원시원한 비트와 Ghost의 자신만만한 가사가 짝을 이룬 -영화 Rocky의 대화가 도입부에 삽입된- "The Champ" 역시 그에 만만찮다. 시어도어 유닛의 멤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Ghost를 도왔고, 우-탱 일원들이 총출동한 "9 Milli Bros."는 오랜만에 'Reunite of Wu-Tang'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매를 맞곤 했던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자전적인 가사로 요즘 부모들의 자녀 양육방식에 개선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Whip You With A Strap"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못 깎아 난감해하는 유쾌한 상황을 그린 "Barbershop" 등 이채로운 주제의 곡도 수록하여 즐거움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A Friend of Mine", "Niggas Bleed" 등 Notorious B.I.G.의 정규작에 수록됐던 곡의 명 벌스(verse)를 재활용한 "Three Bricks"는 보너스 트랙임이 무색할 만큼의 강력함으로 앨범의 말미를 장식한다.

결국 Ghost는 이번 앨범에 크나큰 욕심을 내어 자신을 둘러싼 지인들을 총동원함으로써 '듣기에 별 무리가 없는 썩 괜찮은 앨범'을 만들어 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의 귀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스킷(skit)이 다소 거슬린다는 점 외엔 특별히 흠 잡을 데가 없는 또 하나의 수작이 완성된 셈이다. 한 번 하면 쓰러질 정도로 독한 코케인을 의미하는 슬랭 'Fishscale'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그는 청자들이 쓰러질 만큼 멋진 음악을 만들고자 부단히도 애를 썼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Fishscale]을 통해서 'Ghost는 아무리 못해도 평작 이상의 앨범은 만든다.'는 공식은 더욱 확고해졌고, 이제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계속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행보를 주시하기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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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4. 22:07

KRS-One [Keep Right] (2004)


※ 2005년 or 2006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1. Club Shoutouts
2. Are You Ready For This?
3. Illegal Business Remix 2004
4. The Prayer of Afrika Bambaataa
5. You Gon Go?
6. Phucked
7. A Call To Order: Spoken by Afrika Bambaataa
8. Everybody Rise
9. Stop Skeemin' (feat. Joe)
10. ...And then Again...
11. My Mind is Racing
12. Here We Go (Produced by Q-Bert)
13. Me Man
14. Feel This
15. Dream
16. I Been There
17. Freestyle Ministry (Server Verbals)
18. The I (feat. mad lion)
19. Bucshot Shoutout
20. Rap History (feat. Afrika Bambaataa)
21. Let 'em Have It
22. Still Spittin'
23. The Cutclusion

Record Label : Grit
Released Date : 2004-07-13
Reviewer Rating : ★★★

타 흑인음악 장르에 비해 역사가 짧은 힙합 음악 내에서 수년간 끊임없이 새 앨범을 내놓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80년대 명성을 떨치던 선수들이 21세기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파악해 보라.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 쿨 쥐 랩(Kool G Rap) 등의 이름은 이제 신작을 발표하는 타 뮤지션의 피쳐링 명단에서만 간간히 볼 수 있게 되었고, 쿨 모 디(Kool Moe Dee), 슬릭 릭(Slick Rick)과 같이 역시나 한 인물 하던 선수들의 이름도 최근엔 그 어떤 앨범 크레딧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소위 '올드스쿨 시절 뮤지션'이란 이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곤 하는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뮤직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음악과 떼놓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메인스트림 힙합 씬에서 더 이상 자신들이 서있을 자리가 마땅치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대부분 주류의 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년배의 뮤지션 중 현재까지도 매 해마다 한 장 이상의 신작을 선보이며 혈기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자기 나이 환갑이 될 때까지도 힙합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고 공언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KRS-One(이하 KRS)이다. 넬리(Nelly)와의 디스 전쟁에 의해 손상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자존심 강한 건 변함없는,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 형님은 언제부터인가 자이브(Jive)에서의 앨범 발매를 멈추었고, 인디 씬에서 정규 앨범과 믹스테잎을 비롯한 신작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는 탓에 '앨범 공장장'이란 다소 우스꽝스러운 닉네임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태이다.

2004 New Release : Keep Right

앨범 공장장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듯 수년간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해온 KRS였지만, 그가 2004년 또 하나의 신작을 내놓으며 우리 곁에 다가왔을 때만큼은 국내 팬들도 다작 여부를 떠나서 KRS의 신보에 꽤 큰 기대를 걸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작인 [Kristyles](같은 해에 [D.I.G.I.T.A.L]이란 타이틀의 앨범도 나왔지만 기존에 발표한 곡들을 여럿 포함하는 앨범인지라 신작이라 말하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편의상 전작을 [Kristyles]로 간주한다)가 국내에 라이센스 되면서 나름대로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Kristyles]는 그가 코흐(Koch) 레이블에서 발매한 3장의 정규앨범(나머지 두 장은 [Spiritual Minded]와 [Sneak Attack])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도 충분했던 수작이었기에 [Kristyles]를 접한 사람들이 차기작에 기대를 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후속작 [Keep Right]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결론부터 딱 잘라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치는 앨범'이다. 좀 더 짧고 단호하게 표현하자면 '산만한 앨범'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트로/아웃트로 형식의 곡을 머리와 꼬리에 배치하고, 23트랙 중간 중간에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의 연설을 삽입했으며, 보너스 DVD까지 수록되어 언뜻 봐서는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상당히 푸짐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정작 뚜껑을 열면 석연찮은 구성이 눈에 훤히 보인다. 일단 카운트 베이스 디(Count Bass D)의 앨범을 연상케 하듯 들을만하다 싶은 곡들의 러닝 타임이 대체로 짧은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고, 트랙간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디제이 레볼루션(DJ Revolution), 비트마이너즈(Da Beatminerz) 등이 조력자로 나섰던 전작과 달리 도밍고(Domingo), 텐(Ten), 소울 슈프림(Soul Supreme) 등 새로운 프로듀서들의 힘을 빌린 본 작은 어정쩡하게 비슷한 비트들을 한 데 모아 정규 앨범이란 단위로 조합해 보려다 실패한 듯한 인상이 강하다. 굳이 어색한 부분을 예로 들자면 이런 경우다. ① Black Album Remix와 가리온 싱글 앨범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존 도(Jon Doe)가 주조해낸 트랙인 "My Mind is Racing"에서의 으르렁거림은 왠지 뜬금없게 들리기만 하고, ② "I Been There"와 "The I" 사이에 담긴 "Freestyle Ministry"는 분명 흥겨움을 유발하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앞뒤로 배치된 비장한 분위기에 파묻혀버리고 만다. ③ 디제이 큐벗(DJ Q-Bert)의 기교 만점 스크래칭이 곡의 전부인 "Here We Go"는 대체 왜 삽입되었는지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가 없다. 이쯤이면 앨범을 듣는 동안 거슬리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얘기 다한 셈 아닌가...

물론 산만한 구성 속에서도 '역시 KRS다!'라고 소리치게 만들 곡들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재탕 소릴 들을만하지만 나름대로 강렬한 비트를 장착하여 재구성한 'Illegal Business Remix 2004'는 80년대 BDP 시절의 오리지널 버전을 한 층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교도소에 수감된 지인을 만나는 가슴 찡한 스토리를 통해 좀처럼 보기 힘든 '차분한 KRS-One'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Stop Skeemin'"이 가져다주는 이채로운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Feel This"와 "I Been There"를 통해 단어반복을 주특기로 하는 KRS 특유의 워드플레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할 수도 있고("I Been There"의 I talk how I talk when I talk cause I been there / I walk how I walk when I walk cause I been there와 같은 가사), 슈파스티션(Supastition), 엘 다 헤드터쳐(L Da Headtoucha), 아크바(Akbar) 등 여러 후배들과 함께 화려한 랩의 향연을 수놓는 "Still Spittin'"과 같은 '떼창'도 존재한다(이토록 멋진 곡을 어째서 앨범 후반부에 배치시켜 뒤늦게야 맛보게 한 것인지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앨범의 최대 결점으로 지적되는 '엉성한 구성'은 이렇게 중간 중간에 배치된 양질의 곡들이 주는 재미마저도 반감시켜버리고 만다.

Our Message to KRS-One

안타깝게도 [Keep Right]을 듣고 있으면 어느덧 힙합 씬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 다 된 KRS도 이제는 예전만큼 참신한 음악을 들고 나오긴 힘들어 보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힙합(랩) 뮤지션이 롱런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Keep Right]은 KRS의 다작이 초래한 일종의 '시행착오'라고 봐야할 듯하다. 음악 외적인 일에 힘쓰는 동안에도 본업인 힙합 뮤지션으로의 활동 역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수년간 계속해서 새 앨범을 내놓고 있지만 이제는 다작이 오히려 화를 부르는 상태에 돌입한 것 같다. [Kristyles]나 2002년 발매된 [The Mix Tape]처럼 썩 괜찮은 앨범을 내놓을 수 있다면 우리 힙합 리스너들은 KRS가 손에서 마이크를 놓는 그날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지만, [Keep Right]과 같이 어정쩡한 앨범만 만든다면 청중의 대답은 항상 'No, thanks'가 될 것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가 지금 새 앨범을 제작하는 중이라면 제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BDP 시절부터 쌓아왔던 공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4. 21:59

KRS-One [Return of the Boom Bap] (1993)


※ 2005년 or 2006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01. KRS One Attacks
02. Outta Here
03. Black Cop
04. Mortal Thought
05. I Can't Wake Up
06. Slap Them Up
07. Sound of Da Police
08. Mad Crew
09. Uh Oh
10. Brown Skin Woman
11. Return Of The Boom Bap
12. 'P' Is Still Free
13. Stop Frontin'
14. Higher Level

Record Label : Jive
Released Date : 1993-09-28
Reviewer Rating : ★★★★

변화와 아픔의 시기

케이알에스-원(KRS-One, 이하 KRS)에게 있어 1992년은 다양한 변화를 겪고 앨범 흥행의 실패도 맛봐야 하는 다사다난한 해였다. 우선 그를 주축으로 하여 수년째 힙합 씬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쳤던 부기 다운 프로덕션(Boogie Down Productions, 이하 BDP) 크루는 디-나이스(D-Nice), 자말-스키(Jamal-ski), 스카티 모리스(Scottie Morris) 등 여러 멤버가 빠지고 KRS와 그의 동생 케니 파커(Kenny Parker)를 위시한 소수만이 잔존하여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만들어낸 -BDP의 이름을 내건 마지막 정규 앨범인- [Sex and Violence]는 앨범 판매량이나 주변의 호응 등에서 모두 '대실패'를 하게 된다. 판매량과는 무관하게 [Sex and Violence]는 케니 파커, 프린스 폴(Prince Paul), 디-스퀘어(D-Square) 등이 주조해낸 양질의 비트와 KRS의 혈기왕성한 랩이 잘 버무려진 수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앨범으로 남는다.

전열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역작

초기시절 그 어떤 집단보다도 강렬하게만 느껴지던 그들만의 결속력은 사라진 채, 사실상 KRS만이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BDP 크루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아니 택해야 할 길은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선회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딱히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고, 결국 KRS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BDP의 존재를 뒤로한 채 심기일전하여 이듬해인 '93년 [Return of the Boom Bap]을 발표한다.
KRS가 첫 솔로 앨범에서 택한 프로듀서는 D.I.T.C. 진영의 Kid Capri와 Showbiz, 그리고 DJ Premier(이하 Primo)였다. Primo는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총 6곡의 비트를 제공했는데, 박력 만점의 KRS식 랩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 중에서도 초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Outta Here"는 전형적이면서도 중독성 강한 프리미어(DJ Premier)식 곡 전개(두 마디 루프를 돌리고 턴테이블 리릭으로 훅을 처리하는)에 충실한 최고의 트랙이다. 묵직한 베이스라인과 슬릭 릭(Slick Rick)의 랩으로 처리된 턴테이블 리릭이 가져다주는 흥겨움 속에 KRS는 '80년대 초 힙합을 처음 접한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BDP의 변천사와 퍼블릭 에너미(Public Emeny), 런-디엠씨(Run-DMC), 에릭비 앤 라킴(Eric B. & Rakim) 등 '80년대 힙합 씬의 정상에 있었던 뮤지션들을 일일이 언급해가며 과거를 회고한다.
물론 KRS-프리미어 콤비가 뿜어내는 불꽃은 "Outta Here"에서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불을 지핀다. KRS가 공동 프로듀싱한 트랙 중엔 최면을 거는 카운트다운으로 시작하여 듣는 내내 묘한 기분에 심취하게 만드는 "I Can't Wake Up"과 같이 이채로운 재미를 제공하는 곡도 있다. 마리화나(blunt)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단순히 래퍼에게 최면을 거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알쏭달쏭한 가사는 당시 팬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하게 갈리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그리고 쇼비즈(Showbiz)와 손발을 맞춘 "Sound of da Police"을 통해 KRS 특유의 재기발랄한 가사를 재차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시 LA 폭동으로 논란의 대상이었던 경찰들을 풍자하고자 여타 갱스터 래퍼들과 달리 직설적인 내용을 피하고 발음이 비슷한 두 단어 'Overseer'와 'Officer'를 연달아 외치며 웃음을 유발한다거나, 'My grandfather had to deal with the cops / My great-grandfather dealt with the cops / My GREAT grandfather had to deal with the cops / And then my great, great, great, great... when it's gonna stop?!'과 같이 해학적인 표현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진짜 범죄자는 경찰들('The real criminals are the C-O-P')이라는 결론을 짓는다.
또한, 이전부터 매 앨범마다 접할 수 있었던 레게풍의 분위기를 그리워할 이들을 위한 배려로 "Brown Skin Woman"과 같은 곡도 수록했으며, 비트박스에 맞춰 랩을 하는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Uh Oh"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BDP 시절의 '교훈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이색적이거나 유머러스한 면을 부각시키면서 이미지의 탈바꿈도 어느 정도 신경 썼음을 캐치할 수 있다. 물론 교훈적인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며 '힙합 선생'으로서의 이미지를 다져왔던 그가 다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색다른 모습을 쌍수 들고 환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선생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 작에서도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고, 뮤지션이 이 정도의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니 개인적으로는 굳이 그의 가사에서 교훈적인 내용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달갑잖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공적인 재기

그의 가사가 어찌됐건 간에 부클릿에 명시된 'Return of the Boom Bap Means a Return of the Real Hard Beats and Real Rap'이란 문구에 걸맞게 진정 훌륭한 랩과 비트로 무장한 솔로로서의 첫 행보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리미어를 메인 프로듀서로 기용하고 키드 카프리(Kid Capri)와 쇼비즈를 초대하여 마치 물 만난 물고기가 된 양 열변을 토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실패'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본 작에서의 KRS의 랩은 새로운 마인드로 무장한 특유의 혼이 배어 있는 탓인지 그 어떤 순간보다도 유난히 뚜렷한 주관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Return of the Boom Bap]을 듣고 크나큰 영감을 얻었다는 일화는 앨범이 갖는 가치가 평작 수준 그 이상이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솔로 전향 이후의 첫 결과물이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후 이어지는 [KRS-One]과 [I Got Next]가 등장할 수 있게끔 한 초석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도 초점을 맞추어 보길 권한다. [Return of the Boom Bap]의 성공이 있었기에 [KRS-One]과 같이 명곡으로 점철된 후속작도 나올 수 있었다.
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3. 21:56

Perceptionists [Black Dialogue] (2005)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01. Let's Move
02. People 4 Prez
03. Blo
04. Memorial Day
05. Love Letters
06. Black Dialogue
07. Frame Rupture
08. What Have We Got To Lose?!?
09. Party Hard (feat. Guru & CamuTao)
10. Career Finders (feat. Humpty Hump aka Shock G)
11. 5 O'Clock (feat. Phonte of Little Brother)
12. Breath In The Sun

Record Label : Definitive Jux
Released Date : 2005-03-22
Reviewer Rating : ★★★☆

Introduction - Who are the Perceptionists?

보스턴의 힙합 씬을 논하는 데 있어 아크로바틱(Akrobatik)과 미스터 리프(Mr. Lif)는 빼놓을 수는 없는 선수들이다. 아크로바틱은 "Internet MC's"라는 곡으로 화제를 모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치른 이래 항상 박력 넘치는 랩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왔고, 정규 앨범 [Balance]를 비롯해 많은 이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병행하며 폭넓은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엠씨이다. 미스터 리프도 마찬가지로 보스턴을 대표할만한 정상급 엠씨로서 그 명성이 자자한데, 그는 데피티니브 젹스(Definitive Jux) 레이블의 일원이 되기 이전부터 훌륭한 리릭시스트로 평가받아오던 래퍼였다. 이들 두 명의 베테랑 엠씨와 보스턴 언더그라운드의 프로듀서 겸 디제이 팩츠 원(Fakts One)까지 가세한 퍼셉셔니스츠(Perceptionists: 굳이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자각하는 이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라는 3인조 프로젝트가 구상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은 약 2년 전부터였다. 여러 힙합 웹진의 인터뷰를 통해 당찬 행보를 알린 그들은 2004년 믹스테입 형태의 앨범 [The Razor]를 내놓으며 퍼셉셔니스츠의 존재를 천명하였다. 3총사의 합작과 멤버 개개인의 솔로 트랙 리믹스 등을 두루 섞어 만든 이 앨범을 통해 2005년 데피니티브 젹스 레이블에서 발매될 정식 데뷔 앨범의 발매가 임박했음을 암시하였고, 당연히 팬들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데피니티브 젹스는 그러한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키고자 발매를 두 달 여 앞둔 금년 초부터 레이블 홈페이지 첫 화면에 퍼셉셔니스츠의 데뷔 앨범을 대문짝만하게 내걸고 선주문을 받는 등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고, 2005년 3월 마침내 그 결과물이 공개되었다. 그럼 이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학수고대하게 만들었던 퍼셉셔니스츠의 정규 앨범을 파헤쳐 보자.

Black Dialogue : About Lyrics

사실 이전부터 미스터 리프와 아크로바틱의 명성을 알고 둘의 솔로 앨범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들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또한, 본 작에서 두 선수가 토해내는 랩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만족스럽다. 아크로바틱의 날카로운 랩과 다소곳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미스터 리프의 랩은 각자의 벌스(verse)에서, 혹은 순간순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앨범을 듣다보면 자연스레 보스턴 슈퍼 엠씨 콤비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랩에 빠져들다 보면 크나큰 특징 하나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것은 '주제의 다양함' 이다. 둘은 각각 한 벌스를 나누어 가지며 닭살 돋는 사랑 얘기를 늘어놓기도 하고("Love Letters"), 훵키한 리듬 속에서 겉멋에 치중하는 가짜 엠씨들을 비꼬기도 하며("Career Finders"), 업무를 마친 평일 오후 5시 이후부턴 제발 방구석에 눌러앉아 TV만 보지 말고 밖으로 뛰쳐나가 자유를 만끽하라고 외치기도 한다("5 O'Clock"). 또한 "Memorial Day"에서는 'Where are the weapons of mass-destruction? We've been looking for months and we ain't found nothing. Please Mr. President tell us something. We knew from the beginning that your ass was bluffing!' (대량 살상무기는 어디 있는 걸까? 우린 수개월동안 찾아 헤맸고 아무 것도 없었어. 대통령 양반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우린 처음부터 네가 허풍선이인 걸 알고 있었어.)"이라 말하는 훅(Hook)을 통해 강렬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설파하는 등 정치적인 가사도 아우르고 있다. 이외에 다방면에 걸쳐 깊숙이 뿌리내린 흑인 문화를 찬양하며 케이알에스원(KRS-One), 척 디(Chuck D),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등 선배 뮤지션들에 대한 존경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Black Dialogue",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 각각 보스턴에서의 삶(아크로바틱)과 한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미스터 리프)를 자아낸 마지막 트랙 "Breathe in the Su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뒤섞여 있다.

Black Dialogue : About Beats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얘깃거리를 뒷받침하는 비트는 어떨까? 퍼셉셔니스츠 3총사의 일원인 팩츠 원은 세 곡의 프로듀싱과 앨범 전반에 걸쳐 컷팅을 맡았고, 나머지 곡들에선 엘-피(El-P)와 윌리 에반스(Willie Evans), 그리고 데피니티브 젹스의 신진 프로듀서 싸이러스 더 그레이트(Cyrus the Great) 등이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2004년 미비한 활동으로 팬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엘-피는 본 작을 계기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려는지 그의 손길이 스쳐간 곡들은 유난히 귀에 감기는데, 특히나 "Blo"는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라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Blo" 외에도 에릭 서먼(Erick Sermon)의 랩을 턴테이블 리릭으로 활용한 "Frame Rupture"와 "People 4 Prez" 등 그가 만들어낸 비트는 여전히 실험적이고 비장함이 살아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법한 프로듀서 싸이러스 더 그레이트는 "Memorial Day"와 "What Have We Got To Lose?!?" 두 곡을 통해 썩 괜찮은 반응을 얻어냈고, 윌리 에반스는 "Love Letters"와 "Breathe in the Sun"에서 조력자로 활약하며 다양한 주제에 걸맞은 폭넓은 사운드의 제공에 있어 크나큰 역할을 해냈다.
사실 누구보다도 팩츠 원이 가장 돋보여야 할 이 앨범에서 맹위를 떨치는 이가 오히려 엘-피라는 점이 다소 거치적거리긴 하지만 다양한 주제에 어울리는 폭넓은 비트를 포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러 프로듀서를 섭외한 것이기에 결코 큰 문제로 작용하진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어설픈 Club Shit'을 들려주는 카뮤 타오(Camu Tao)의 "Party Hard"와 같은 곡에 있다(비단 어정쩡한 비트뿐만 아니라, 곡의 가사는 제목 그대로 파티를 즐기자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어딘가가 불편한 상태에서 랩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미스터 리프와 뜬금없이 튀어나와 모노톤으로 읊조리면서 찬물을 한 번 더 끼얹는 원조 보스턴 형님 구루(Guru)의 모습도 분위기와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곡을 과감하게 빼고 -중복을 감수하고서라도- 믹스테입 앨범 [The Razor]에 수록된 양질의 트랙들을 수록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Outro

앨범은 두 랩퍼가 전달하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분명 즐거움을 준다. 특정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얘깃거리를 이렇게 짧은 러닝타임에 꾹꾹 눌러 담았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두 엠씨가 주거니 받거니 랩을 하는 모습은 레드맨 & 메소드맨(Redman & Method Man), 블랙 스타(Black Star) 등의 명콤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지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Party Hard"와 같은 트랙은 그저 주제의 다양함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소 억지로 끌어들여 만든 곡으로만 보인다는 점과 팬들의 기대만큼 길지 못한 러닝타임이 못내 아쉽다. 물론 12트랙 41분의 짧은 시간 안에서 스킷(skit) 없이 풀타임 트랙만으로 구성하여 '짧고 굵은 앨범'을 콘셉트로 정하고 그것에 충실했음이 눈에 훤히 보이지만, 기왕 그러한 콘셉트를 정했다면 좀 더 욕심을 내어 몇 곡을 더 수록해도 좋았을 것 같다. 시작부터 거창했던 보스턴 출신 삼총사의 프로젝트는 랩 가사의 다양함과 그에 상응하는 여러 프로듀서들의 조력으로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아쉬움도 남는다.
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3. 21:42

7L & Esoteric [Dangerous Connection] (2002)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01. One Six
02. Watch Me
03. Warning
04. Terrorist's Cell
05. Precision
06. Word Association
07. Stalker
08. Speak Now (feat. Vinnie Paz & Apathy)
09. Rules Of Engagement (feat. J-Live & Count Bass D)
10. Riccardi Man
11. Herb
12. What I Mean (feat. Beyonder)
13. Rest In Peace
14. The Way Out

Record Label : Landspeed Records
Released Date : 2002-10-08
Reviewer Rating : ★★★☆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더 힙합 씬에 애정을 갖고 이를 주시하는 리스너들의 머릿속에 美 동부의 보스턴이란 도시는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득세하여 힙합의 본고장인 뉴욕 못잖게 다양한 힙합퍼들이 공존하는 지역'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해마다 열리는 보스턴 힙합 어워드만 놓고 보더라도 그곳의 씬이 얼마나 활성화되었는지를 지레 짐작해볼 수 있다.
워낙 기라성 같은 존재들이 많아 특정인(혹은 팀)을 가리켜 'Representin' Boston'이라 말하기는 모호하지만, 오랜 기간 지역의 이름을 빛내고 있는 선수들임엔 틀림없는 세븐엘 앤 에소테릭(7L & Esoteric)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그들의 소포모어 앨범 [Dangerous Connection]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Dangerous Connection

세븐엘(7L)과 에소테릭(Esoteric)은 '90년대 말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Esoteric)와 청취자(7L)의 관계로 서로를 알게 되면서 팀을 결성하였고, 싱글 앨범을 한 데 모은 EP [Speaking Real Words](1999), 정규 앨범 [The Soul Purpose](2001)를 통해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했다. 베이비그랑데(Babygrande) 레이블의 대들보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Jedi Mind Tricks)를 비롯하여 데미가즈(Demigodz)의 모든 멤버들, 로 프로듀스(Raw Produce)를 위시한 동지역 출신의 선수들, 세븐 헤즈(7 Heads)의 대표 격인 제이-라이브(J-Live)에 이르기까지 언더 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여러 뮤지션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1집 [The Soul Purpose]에는 이처럼 친분이 있는 뮤지션들을 대거 참여시켰는데, 몇몇 트랙에선 두 명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게스트들의 화려한 네임 밸류나 퍼포먼스가 부각되어 주객이 전도되는 역효과를 야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많은 이들이 기대를 모았던 1집이 생각 외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팬들의 아쉬움을 알아차렸는지 그들은 2집 [Dangerous Connection]에선 게스트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프로듀싱 면에서도 앨범의 3/4 가량을 세븐엘이 도맡는 등 180도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1집 시절 상당수의 곡을 제공했던 바이닐 리애니메이터스(Vinyl Reanimators)와 디제이 스피나(DJ Spinna) 등의 이름은 2집의 앨범 크레딧에선 찾아볼 수 없고, 컷마스타 컷(KutMasta Kurt), 스투프(Stoupe), 그리고 비욘더(Beyonder)가 3~4개의 트랙만을 담당할 뿐 나머지는 모두 세븐엘의 몫이다. 이는 '이제는 우리 이름을 내건 앨범에서만큼은 우리들만의 칼라를 뚜렷하게 어필하겠다.'는 두 주인공의 당찬 의도로 해석된다.

Esoteric's Rapping

턴테이블 리릭으로 훅(Hook)을 처리한다거나 다소 어두운 느낌으로 일관하는 세븐엘의 전형적인 비트가 펼쳐지는 가운데 에소테릭의 랩이 펼쳐진다. 사실 에소테릭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랩으로 듣는 이를 압도해버리는 모습은 전작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정박 랩의 교본'을 정의하던 모습(예를 들면 1집의 "Verbal Assault"나 "Speaking Real Words" 같은 곡)과 특유의 쏘아붙이기식 랩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가져다주는 재미는 오히려 전작을 한 단계 뛰어넘은 듯하다. 초반부의 "Watch Me"를 통해 '궁극의 끝없이 쏘아붙이는 랩'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첫 트랙 "One Six"를 통해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순식간에 극대화시키고, 이어서 보스턴 공항의 비행기를 하이재킹(hijacking) 하고자 준비 중인 테러리스트의 관점에서 랩을 하는 이색적인 주제의 트랙 "Terrorist's Cell"에서는 스투프의 비장한 비트와 짝을 이루기도 한다. 게다가 단순히 살벌함만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Word Association"과 같은 곡을 통해 유머러스한 리릭도 접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특정 단어와 그에 상응하는 연상 단어를 열거하는 이 곡에서는 중간 중간 연예인들의 이름도 거론되는데, 'Tom Cruise - Ray Ban, Elton John - Gay Man', 'Kid Rock - White Trash, Limp Bizkit - Don't Ask'와 같은 가사는 그야말로 폭소를 자아낸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Inspectah Deck 뺨칠 만큼 뛰어난 정박 랩을 구사하는 에소테릭은 후반부에 배치된 "Herb"를 통해 자신의 그러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하는데, 'You're a herb'로 시작하는 매 문장마다 수놓은 라이밍은 차례차례 짚어간다면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지적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

그들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흔적이 보이고, 여전히 불꽃 튀는 에소테릭의 랩을 감상할 수 있지만 세븐엘의 프로듀싱은 그다지 발전이 없다. 어둡고 긴장감 넘치는 비트는 분명 그의 트레이드마크지만 그러한 스타일만으로 일관한다면 청자는 쉽사리 짜증을 느끼기 마련이고, 큰 변화 없이 흘러가는 일정 속도의 BPM 역시 지루함을 유발한다. 앨범의 하이라이트 격인 "Word Association" 이후부터 후반부까지 무언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래전 세븐엘은 어느 웹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비슷한 스타일을 지닌 20여개의 비트를 한 앨범에 넣어 100% 만족스러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정립된 하나의 스타일에 충실한 앨범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양산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이것은 분명 듣는 이를 위한 배려가 아니다. 게다가 작년 발매된 3집 [DC2 : Bars of Death]에서는 뭔가 달라질 거라 믿었건만 여전히 대체로 비슷비슷한 질감의 샘플과 변화를 감지하기 힘든 일정 루프를 고집하여 허탈함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것 같은데도 말이다.
결국 이처럼 불완전한 형태의 프로듀서-엠씨의 조합은 과연 앨범 타이틀과 같은 진정한 'Dangerous Connection'이라 말할 수 있는지가 의문스러워질 뿐이다.

풀어야 할 과제

이미 보스턴 언더그라운드 씬의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세븐엘과 에소테릭이지만, [Dangerous Connection]을 비롯한 일련의 산물들을 하나둘씩 상기하다 보면 그들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다는 생각이 든다. 보스턴 출신의 이 두 인물이 가장 최적화된 1 프로듀서 & 1 엠씨 포맷이라 할 수 있는 거장 갱 스타(Gang Starr, Primo & Guru)나 피트 락 앤 씨엘 스무스(Pete Rock & CL Smooth)처럼 모두가 존경할만한 뮤지션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바탕에 두고 청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처럼 결점이 쉽게 드러나면서도 매 앨범마다 하나둘씩 눈에 띄게 완벽한 곡 - 본 작을 예로 들자면 세븐엘의 박진감 넘치는 비트와 에소테릭의 타이트한 랩 뿐 아니라 고스트페이스(Ghostface)의 목소리를 활용한 턴테이블 리릭까지 첨가되어 흠잡을 데가 없는 "Watch Me"와 같은 트랙 - 이 포진되어 있는 탓인지 그들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기도 참 힘들다. 그래, 그렇다면 결국 인내를 갖고 차기작에 또 한 번의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는 없겠다. 제발 부탁인데 4번째 정규 앨범에선 '아직도 EP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이상 나돌지 않게끔 확실한 한 방을 보여줬으면 한다.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01. Intro (Life)
02. D. Original
03. Brooklyn Took It
04. Perverted Monks In Tha House (Skit)
05. Mental Stamina
06. Da Bichez
07. You Can't Stop The Prophet
08. Perverted Monks In Tha House (Theme)
09. Ain't The Devil Happy
10. My Mind Spray
11. Come Clean
12. Jungle Music
13. Statik

Record Label : PayDay/FFRR
Released Date : 1994-05-24
Reviewer Rating : ★★★★☆

Intro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 듣는 장르(혹은 좋아하는 스타일)가 있기 마련이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94~'95년에 발매된 힙합 앨범들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마냥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가끔은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몇몇 음반의 타이틀명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마치 정제되지 않은 보석처럼 로우(raw)하고 칙칙한 사운드로 대변되는, 로-파이(Lo-fi)의 미학이 담긴 90년대 초중반의 앨범들이 주는 매력은 현 힙합 씬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과는 너무나 상이하지만, 나를 포함해 일단 한 번 빠져든 사람이라면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미스테리한 마력이 있었기에 그런 설렘이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당시의 그러한 스타일을 주도해가던 프로듀서 중엔 대표적으로 - 물론 르자(RZA)를 비롯한 여러 프로듀서들이 비슷한 시기에 명성을 날리긴 했지만 -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 이하 프리미어)가 있었고, 94년 프리미어의 행보를 추적해 보면 제루 더 대머저(Jeru The Damaja)라는 랩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Here Comes Jeru's Debut Album

Kendrick Jeru Davis라는 본명을 가진 제루 더 대머저(이하 제루)는 10살 때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90년대 초부터 갱스타 파운데이션9Gang Starr Foundation)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갱 스타(Gang Starr)의 [Daily Operation] 앨범 수록곡 "I'm the Man"에서였는데, 마지막 벌스에서 멋진 랩을 감상할 수 있다. 갱스타 파운데이션의 멤버로 활약하며 투어에도 합류하는 등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가던 중 93년 "Come Clean"이란 싱글 앨범을 선보이며 계속해서 인지도를 넓혀 가는데, 이는 이듬해 발매될 그의 정규 앨범을 위한 전초전격인 곡이었고, 이듬해인 '94년 마침내 DJ Premier가 전 곡 프로듀싱을 도맡은 데뷔작 [The Sun Rises in the East]를 내놓기에 이른다.

프리미어와 구루(Guru)가 Executive Producer로서 제작을 총괄한 이 앨범은 암흑빛으로 물든 뉴욕 시의 고층 빌딩들과 교각을 그려낸 커버부터 음산하고 거친 분위기를 메인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지레 짐작케 한다. 프리미어가 꾸준히 보여주었던 궁극의 2박자 루핑이나 턴테이블 리릭으로 훅 처리하기와 같은 작법이 비슷한 시기 그가 일궈냈던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질펀하게 깔아둔 비트 위에 화답하듯 제루는 최상의 랩을 들려준다. 적당히 묵직한 톤으로 명확한 발음을 구사하며 그다지 스피디하진 않지만 라이밍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수준급인데, 또렷한 발음을 기반으로 하는 견고한 라임은 40분의 러닝타임 도중 어디에서나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굳이 특정 구절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
게다가 제루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단어를 끊어 읽는 독특한 랩 스타일을 지녔는데 이 또한 프리미어의 비트와 매우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가령 "D. Original"을 듣다 보면 histo-ry, pin-eal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단어 사이를 끊어 읽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덴터티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제루만의 스타일로 남아 그의 최신작 [Divine Design]에서까지도 캐치할 수 있다.

가사의 내용에 있어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론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인 표현이 자주 쓰인 탓인지 마초이즘의 극을 달리는 여타 하드코어 랩과는 구분 지을 필요가 있다. 백인들(Whitey)을 악마(devil)에 빗댄 "Ain't the Devil Happy"와 예언자(Prophet)와 Mr. Ignorance(무지)의 대결을 묘사한 "You Can't Stop the Prophet"은 우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재치 있는 라임으로 창녀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Da Bichez", "I'm the Man"에서부터 천명했던 "Dirty Rotten Scoundrel"이란 닉네임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D. Original"과 "Come Clean"에 이르기까지 제루의 가사는 브루클린에서 살아오면서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경험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외에 아푸-라(Afu-Ra)와 벌스를 주고받는 - 2집의 속편 "Physical Stamina"를 연이어 들으면 더욱 흥미로운 - "Mental Stamina"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트랙이며, 각각 케이알에스원(KRS-One)과 오닉스(Onyx)의 랩을 턴테이블 리릭으로 활용한 "Brooklyn Took It", "Come Clean"의 훅(hook)이 주는 재미 또한 놓쳐선 안 될 흥밋거리 중 하나이다. 이처럼 앨범은 특별히 흠잡을 데 없이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고, 마지막 트랙 "Statik"에 이르기까지 거친 비트와 랩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짐으로서 제루는 당시 구루와 프리미어가 물색하던 "Next Generation of Gang Starr"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을 입증해낸다.

And Then...

그로부터 2년 뒤인 96년 다시 한 번 프리미어와 호흡을 맞춰 'Hiphop Savior'와 'Kung Fu Fighter'의 이미지메이킹을 병행한 2집 [Wrath of the Math]를 발매하고 이 또한 언더그라운드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허나 '90년대 말 돌연 프리미어의 조력에서 벗어나 Knowsavage라는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신작 [Heroz4hire]는 제루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한 곡 하나하나가 기대 이하라는 혹평을 들었고, 일부 평단에서는 전작들의 명성을 깎아내린 졸작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에드 단테스(Ed Dantes)와 세이버(Sabor)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한 최신작 [Divine Design](2003) 또한 그다지 귀에 감기는 맛이 없어 아쉬움만이 남는다.

Outro

간만에 무엇 하나 버릴 곡이 없던 그의 데뷔작을 CD 수납장에서 꺼내어 듣다 보니 3집 이후의 결과물과 더더욱 대조를 이루는 것 같고, 동시에 '90년대 말부터 전개해온 음악 활동을 상기하자니 맥이 빠지기도 한다. 인디레이블을 설립하고 소수의 지인들을 불러들여 프로덕션을 구축하는 등 독립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 무엇일까? 단지 프리미어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음악 행보를 이어나가기 위함이었을까...?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결과물의 퀄리티를 생각하니 현재 그의 행보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해 온 까닭은 또 뭘까? 모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좀 더 많은 프로듀서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항상 그렇진 않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고, 현재 그런 점에 대해선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 물론 갱스타 파운데이션이 와해됨에 따라 세간에선 크루를 완전히 탈퇴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무근이라 한다. 지금도 가끔씩 프리미어를 만나고 있으며 현재 릴 댑(Lil' Dap)과의 조인트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고 하니 말이다.

뭐 2집 이후 펼쳐나간 행동들이 어찌됐건 간에 그의 데뷔작은 마치 다소 침체기에 빠져 있었던 동부 힙합 씬의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등 힙합의 역사성에서도 기여한 바가 크기에 94년을 대표할만한 역작임은 분명하다. 동년에 발매된 갱 스타의 [Hard to Earn]이나 나스(Nas)의 [Illmatic]에서 느낄 수 있던 특유의 쾌감이 고스란히 담긴 언더그라운드 클래식 [The Sun Rises in the East]는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명반으로 영원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중반의 힙합씬에 낭만을 갖고 있는 리스너라면 제루의 3집 이후의 음악 행보는 잠시 잊고 [The Sun Rises in the East]를 다시금 플레이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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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3. 21:10

Theodore Unit [718] (2004)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Record Label : Sure Shot
Released Date : 2004-08-03
Reviewer Rating : ★★★★

01. Guerilla Hood
02. Punch in Punch Out
03. '88 Freestyle
04. The Drummer
05. Gatz
06. Who Are We?
07. Smith Brothers
08. Mama Can You Hear Me
09. Paychecks
10. Wicked With Lead
11. Daily Routine
12. Right Back
13. Pass the Mic
14. Work
15. It's the Unit
16. Be My Girl

2004년 고스트페이스(Ghostface)의 행보

2004년 한 해 동안 우-탱의 주요 멤버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이는 단연 고스트페이스(Ghostface)였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아마 없을 것 같다. 10여 년간 써왔던 'Ghostface Killah'라는 이름에서 'Killah'를 없애고 'Ghostface'로 짤막하게 개명한 후 내놓은 4번째 솔로 앨범 [The Pretty Toney Album] 활동뿐만 아니라 마스타 킬라(Masta Killa), 메소드 맨(Method Man), 엑세큐셔너스(X-Ecutioners)와 거장 데 라 소울(De La Soul)의 신보에의 참여(물론 단순히 앨범 크레딧의 한 줄을 장식했다는 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최상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 개명한 Ghostface라는 이름을 더욱 빛냈다)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활동했던 까닭에 작년 발매된 힙합 앨범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The Pretty Toney Album]의 경우 비록 흥행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래퀀(Raekwon)이나 메소드 맨 등 타 우-탱 멤버들의 신작들보다 질적 측면에서 큰 우위를 보이며 망해가는 우-탱 제국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고스트페이스가 보낸 2004년을 상/하반기로 나누어 볼 때, 상반기의 두드러진 특징이 양질의 솔로 앨범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면 하반기의 대표적인 활동은 자신의 크루를 공개하고 크루의 음반을 발매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시어도어 유닛(Theodore Unit)이란 크루와 앨범 [718]이 고스트페이스의 음악 행보에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당연히 크루의 앨범을 들어봄으로써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고스트페이스의 크루 시어도어 유닛

시어도어 유닛은 리더 고스트페이스 외에 트라이프 다 갓(Trife Da God, 이하 트라이프), 카파도나(Cappadonna), 숀 윅스(Shawn Wigs), 솔로몬 차일즈(Solomon Childs), 크라임 라이프(Kryme Life), 두 릴즈(Du-lilz)의 7명으로 구성된 크루이다. 우-탱의 10번째 멤버라 불리는 카파도나와 고스트페이스의 앨범에 참여했던 트라이프 이외엔 대부분 생소한 이름들이라 혹자는 난감해 하는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러한 염려는 젖혀두고 뚜껑을 열어보자.

브루클린의 지역번호 '718'을 타이틀로 내건 본작은 케이-데프(K-Def), 마일스톤(Milestone), 더티 딘(Dirty Dean), 에이밀(Emile), 셀프(Self) 등 여러 프로듀서가 7명의 랩퍼들을 위해 썩 괜찮은 돗자리(비트)를 깔아두었다. 개중에 "Guerilla Hood", "The Drummer", "Smith Brothers" 등은 [The Pretty Toney Album]에 수록하고자 녹음했던 곡들로 알려져 있는데(그렇다고 하여 [718]이 고스트페이스가 그저 자신의 앨범에 수록하지 않은 곡들과 기존에 녹음했던 곡들을 대강 정리하여 뚝딱 만들어낸 앨범은 절대 아니다), "Guerilla Hood"와 같은 곡은 도대체 왜 고스트페이스가 자신의 솔로 앨범에 수록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비트와 멋진 랩을 들려주고 있다. 쾌조의 스타트를 끊는 "Guerilla Hood"를 비롯해 "Gatz", "Daily Routine", "88 Freestyle" 등에선 올드 스쿨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으며, Method Man과 Street Life가 객원 참여하여 raw한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 "The Drummer", 또 한 명의 게스트 본 크러셔(Bone Crusher)가 코러스를 담당하여 거친 비트와 잘 맞물리는 - 시어도어 유닛의 존재를 천명하는 트랙인 - "Who are We?", 피아노 루프와 보컬의 절묘한 조화가 빛나는 "Paychecks"에 이르기까지 청자를 배려한 프로듀서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한편 음반은 랩 크루의 앨범이니만큼 그들이 펼치는 랩의 향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멤버는 당연히 리더 고스트페이스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의 소유자 트라이프의 존재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데, 전체 16곡 중 절반 가까운 7곡에 참여하여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고스트페이스의 솔로 앨범[Bulletproof Wallets], [The Pretty Toney Album] 등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찰떡콤비의 탄생을 예고해왔던 트라이프는 [718]에서 또다시 발군의 기량으로 고스트페이스와 듀오를 이루어 기대치를 충족시킨다.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의 클래식 앨범 [Long Live the Kane]에서 듣던 친숙한 비트 위에 펼쳐지는 2분여의 짧고 굵은 트랙 "88 Freestyle", 퀸(Queen)의 명곡 "We Will Rock You"의 가사를 개사한 코러스가 인상적인 "Smith Brothers", "Paychecks" 등에서 감지할 수 있는 고스트페이스 - 트라이프 듀오의 불꽃 튀는 랩을 듣노라면 흐뭇하다 못해 황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그간 우탱의 여러 앨범에서 검증됐던 최고의 조합 중 하나인 고스트페이스 - 래퀀 콤비와 견줄만한 막강한 파워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핵심 멤버 외에 나머지 5인의 활약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나 이들을 간과해 버린다면 그것은 큰 실수이다. 카파도나는 앨범 전체를 통틀어 단 2개의 벌스(verse)만을 담당하여 존재감이 떨어져 보이지만 숀 윅스, 크라임 라이프 등 타 멤버들이 고군분투하며 남은 자리를 잘 메워주고 있다. 숀 윅스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그려낸 "Daily Routine"에서 제 기량을 발휘함과 동시에 그 외 몇몇 곡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해내고, 크라임 라이프는 "Right Back"이란 곡의 마지막 벌스를 무난하게 해내며 깔끔한 마무리를 이끈다.
다만, 세 개 이상의 트랙에 등장하며 은근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걸걸한 목소리의 멤버 솔로몬 차일즈는 큰 아쉬움을 남긴다. "Mama Can You Hear Me", "Be My Girl", "Work" 등 몇몇 곡을 혼자만의 활약으로 장식하지만 앨범의 전체적 분위기와 동떨어진 사랑고백이란 소재를 다룬 트랙 "Be My Girl"은 굵직한 목소리와 나른한 가사가 불협화음을 이룬 탓에 거치적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이 곡을 마지막 트랙으로 배치시킨 것은 그야말로 다된 밥에 재를 떨어뜨린 격이었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718]

앞서 언급했듯이 솔로몬 차일즈의 솔로 트랙들이 좀 거슬리긴 하나, 크루 멤버들 하나하나의 개성 넘치는 랩을 감상하며 흐뭇해할 수 있는 썩 괜찮은 퀄리티의 앨범이다. 사실 고스트페이스가 멤버들과 함께 녹음하지 않은 형태의 트랙도 많아 컴필레이션 성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짜인 구성으로 결점을 충분히 보완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고스트페이스의 음악 행보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크루를 끌어들여 만든 앨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겠지만 그런 점을 떠나서 듣는데 별다른 무리를 주지 않는, 즐거운 감상을 도모하는 앨범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재차 강조하지만 트라이프라는 대단한 인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앨범을 들으면서 얻는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P.S : 부클릿에서 다음과 같은 독특한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Ghost made his major league debut : spring '93 on the Wu-Tang Clan : Enter the Wu-Tang
1st Major League Hit : Only Built 4 Cuban Linx
1st Major League Run : The Ironman Album
1st Major League Home Run : Supreme Clientele
1st World Series : The Pretty Toney Album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어도어 유닛의 [718]은 "World Series 2차전"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고스트페이스는 2005년 현재도 활발하게 랩 씬을 누비고 있는데, 위의 문구를 읽으니 대망의 World Series Champion이 되고자 변함없이 마이크를 잡고 음악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Article/Review | Posted by epmd 2011. 4. 23. 20:55

El-P [Fantastic Damage] (2002)


※ 2005년 웹진 리드머(http://www.rhythmer.net)에 기재한 글.

Record Label : Definitive Jux
Released Date : 2002-05-13
Reviewer Rating : ★★★★

1. Fantastic Damage
2. Squeegee Man Shooting
3. Deep Space 9mm
4. Tuned Mass Damper
5. Dead Disnee
6. Delorean
7. Truancy
8.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9. Accidents Don't Happen
10. Stepfather Factory
11. T.O.J.
12. Dr. Hellno and the Praying Mantus
13. Lazerfaces' Warning
14. Innocent Leader
15. Constellation Funk
16. Blood

Before Fantastic Damage

컴퍼니 플로(Company Flow)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엘-피(El-P)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로커스(Rawkus)의 이름을 빛낸 [Funcrusher Plus]에서 그가 차지하던 비중은 한솥밥을 먹던 미스터 렌(Mr. Len)과 빅 주스(Bigg Jus)의 그것과 차별화될 만큼 컸던 탓에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컴퍼니 플로의 해체 직전이나 해체 이후에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두며 게스트로서의 활동도 틈틈이 해내는데, 베이 에어리어(Bay Area)로 날아가 쿼넘(Quannum) 패거리의 앨범과 델 더 훵키 호모사피언(Del The Funky Homosapien)의 솔로앨범, 핸섬 보이 마덜링 스쿨(Handsome Boy Modeling School)의 앨범에 참여하는가 하면 데프 젹스(Def Jux)라는 인디레이블을 설립하여 언더 힙합씬의 도처에서 여러 실력자들을 규합하기도 한다. 컴필레이션 앨범 [Def Jux Presents Vol.1]으로 데프 젹스의 출범을 알리며, 레이블의 이름을 내건 첫 정규작인 캐니벌 옥스(Cannibal Ox)의 [The Cold Vein]에선 앨범 프로듀싱을 총괄하며 두 엠씨와 호흡을 맞췄다. 우주적인 사운드와 캐니벌 옥스의 멋진 랩이 조화를 이룬 [The Cold Vein]은 같은 해 역시나 데프 젹스에서 발매된 에이솝 락(Aesop Rock)의 [Labor Days]와 함께 많은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엘-피의 솔로앨범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Enter the Fantastic Damage

엘-피는 캐니벌 옥스의 앨범을 작업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솔로앨범 제작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였고, 캐니벌 옥스의 앨범으로 불타오른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년 후 마침내 [Fantastic Damage]라는 타이틀의 신작을 발표한다.
결론부터 말해 전체적인 사운드의 흐름은 '자기과시'와 '지독함' 그 자체이다. 캐니벌 옥스의 앨범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준 난잡한 비트들과 독특한 드럼 프로그래밍은 본작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여 이른바 '극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70여분의 긴 러닝타임이 끝나는 시간까지 청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는 엘-피의 계속되는 엇박 랩과 꽈배기 마냥 꼬일 만큼 꼬인 비트, 그리고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하는 디제이 어빌리티스(DJ Abilities)의 스크래칭을 감상하게 된다. 본 앨범의 제작에 사용된 샘플러와 믹서, 오르간의 리스트를 앨범 부클릿에 열거해둔 것 또한 충만한 자신감의 표현(혹은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99년 12인치 싱글로 먼저 선보였던 "Deep Space 9mm"를 주목해보자. 독특한 비트와 공격적인 랩은 충격으로까지 다가오는데, 국내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기에(심지어 이 곡을 듣고 나서 곧바로 CD를 구매하러 뛰쳐나갔다는 분들도 있었다) 마땅히 비중을 두고 들어봐야 할 곡이다. 엘-피 주위의 사람들이 항상 그에게 빨간 총을 겨누는 독특한 컨셉의 뮤직비디오도 또 하나의 재미로 작용한다.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루브함을 제공하는 "Dead Disnee", 3연작을 한 곡에서 감상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끝을 향해 달리기 위한 전초전 격인 유일한 인스트루먼틀 트랙 "Innocent Leader", 또다시 분노의 랩으로 치솟는 "Constellation Funk"에 이르기까지 굳이 특정 트랙에 집착할 필요 없이 곡 하나하나가 엘-피의 자신감의 산물이다.

자, 그럼 이렇게 시종일관 첨단의 사운드로 청자의 귀를 압박해 오는데 이에 상응하는 엘-피의 랩은 어떨까? 컴퍼니 플로 시절부터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든 빠른 랩을 구사하며, 랩 톤 자체가 개성이 없는 까닭인지 간혹 '국어책을 빠르게 읊조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하지만 그의 랩은 가사를 세밀하게 읽어가며 들어볼 필요가 있다. 엘-피는 앨범 전반에 걸쳐 부정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를 묘사하며 때로는 직설적인 맹공을 퍼붓기도 하는 등 표출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Fantastic Damage"에서부터 시작되는 분노의 랩핑을 서두로 파멸의 디즈니랜드를 묘사하는 "Dead Disnee", 소름 돋는 미래를 생생하게 그려낸 "Stepfather Factory", 몰지각한 랩퍼들을 비난하는 "Constellation Funk" 등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성향의 가사는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차례도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반면에 이처럼 냉철한 가사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특유의 라이밍과 위트를 캐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Truancy"에서 들을 수 있는 'Rawkus was like, "we're gonna take this label to another level" / (fuck that) I'm gonna take this level to another label'(엘-피는 컴퍼니 플로 시절 로커스 레이블을 맹비난하며 인연을 끊어버린 적이 있는데, 쌓였던 게 많았는지 자신의 솔로앨범에서 이처럼 재치있는 워드플레이로 레이블을 조롱한다), 'Jam Master Jay would've shot you (I stopped him)'과 같은 구절을 들으면 곡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본 앨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엘-피의 의도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네거티브한 신념을 끊임없이 폭파하는 사운드와 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간 여러 매체에서 지적해 왔듯이 이러한 초고밀도 비트와 랩의 동시 감상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는 피해갈 수 없는 단점으로 지적된다. 청자의 귀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화려한 전자음과 스피디한 랩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불규칙한 드럼 루프와 끝없는 전자음에 빠져버리는 사이 엘-피의 랩은 신경 쓸 틈이 없으며, 역으로 리릭에 심취하는 사이 화려한 폭파음의 감상은 어려워진다. 엘-피 본인 역시 이러한 측면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몇 달 뒤 인스트루먼틀 앨범 [Fantastic Damage Plus]를 따로 발매하는 등 나름대로 팬들에게 서비스 차원의 배려(?)를 해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After Fantastic Damage

이후로도 엘-피는 데피니티브 젹스 레이블의 CEO로 활약하며 레이블에서 발매되는 모든 앨범마다 Executive Producer로 관여하고 있으며, 2002년 미스터 리프(Mr. Lif)와 2003년 멀스(Murs)의 앨범에서도 변함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등 레이블의 수장 겸 특급 프로듀서로 맹활약해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Fantastic Damage] 시절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비트를 양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빈번하게 들려오고 있다. 2004년 자신의 아버지께 바치는 재즈 앨범 [High Water]를 발매하고 미공개 트랙들을 모아놓은 앨범 [Collecting the Kid]를 선보이며 작년 한 해도 나름대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필자와 같이 [Fantastic Damage] 시절의 화려한 사운드의 향연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오히려 실망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다행히 올 초엔 고스트페이스(Ghostface)와의 공동작업을 해내고, 최근엔 퍼셉셔니스츠(Perceptionists)의 앨범에 수록된 12곡 중 3곡의 비트메이킹을 맡아 그럭저럭 괜찮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등 서서히 예전의 막강한 모습을 되찾는 것 같다.

발매된지 근 3년이 지났지만 [Fantastic Damage]에서 보여줬던 엘-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언젠가 또다시 청자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어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담고 있는 것 같다. 70여분의 시간으론 성이 차지 않는 양 끝없이 토해내던 분노의 랩핑과 충격적이었던 노이즈의 향연이 그 이유이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후속 앨범에서는 사운드와 리릭의 확실한 조화가 이루어지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자 El-P가 풀어야 할 과제일 것임을 누구보다도 엘-피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Free Talking | Posted by epmd 2011. 4. 16. 17:12

시작.